지난 2월 5일 대구지법 법정. 재판장은 "피고는 원고에게 13억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주문을 읽었다. 원고석에 앉은 전봉수(61) 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랑인복지시설 강제수용에 대한 국가 책임이 인정됐지만 선고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적장애인인 전 씨는 법정을 나온 뒤 시민단체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결과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원고가 봉수님이고 피고가 대한민국이에요. 봉수님이 이긴 거예요."
전 씨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겼다. 천안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판결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2주가 걸렸다.
형사사법체계의 개편을 앞두고 있지만, 대구경북에서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재판정보 접근권이 여전히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난해한 법률용어와 긴 문장으로 작성된 판결문은 판결 결과를 이해하고 후속 절차를 판단하는 데 장벽이 되고 있다. 재판 당사자가 자신의 판결 결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사법 접근성 개선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일부 법원서 시작된 '쉬운 판결문'
쉬운 문장과 삽화를 활용한 '쉬운 판결문(이지리드 판결문)'을 선제적으로 제공하는 곳이 일부 법원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올해 들어 전국의 일부 법원은 판결을 쉬운 말과 그림으로 설명한 '쉬운 판결문'을 내놓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지적장애인의 장애인 등록 거부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취소는 결정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소송에 들어간 돈은 구청이 냅니다"라는 설명을 판결문에 함께 적었다.
구청의 주장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판결에 따라 구청 결정이 사라진다는 결과도 풀어서 설명했다. 원고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삽화도 넣었다.
지난 5월에는 서울남부지법과 수원지법 안산지원 등이 장애인이 당사자인 형사사건에서 '쉬운 판결문'을 작성했다. 행정사건에서 시작한 시도가 형사사건으로도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쉬운 판결문 작성은 수도권을 넘어 지역 법원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울산지법은 지난달 원고와 피고가 모두 고령자인 소액 민사소송에서 최초로 '쉬운 판결'을 선고했다.
울산지법 민사2단독 권형관 부장판사는 공사업자 A(78) 씨가 집주인 B(67) 씨를 상대로 낸 공사대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기존 판결과 별도로 당사자가 결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을 작성했다. 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자 등 법률 문서를 이해하기 어려운 재판 당사자로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문에는 어렵고 복잡한 법률 용어 대신 간단한 문장과 일상적인 표현이 사용됐으며, 양측이 재판 내용과 결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돈다발 그림 등을 사용했다.
'쉬운 판결문'은 2022년 서울행정법원에서 처음 등장했다. 사법정책연구원은 2024년 문장을 짧게 쓰고 쉬운 단어와 시각자료를 활용하는 작성 방안을 담은 연구보고서를 냈다.
◆26쪽 판결문, 난해한 법률용어 장벽
이 같은 변화와 달리 대구경북에서는 아직 '쉬운 판결문' 작성 사례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씨의 사례처럼 삶을 바꿀 수 있는 재판 결과를 듣더라도 다른 사람의 설명을 거쳐야 판결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전 씨가 받은 판결문은 26쪽에 달했다. 재판부는 국가의 부랑인 단속 정책과 국가배상책임 법리, 손해배상액 산정 근거 등을 설명했다. '기관위임사무', '법률유보원칙', '소멸시효 완성 항변' 같은 법률용어가 이어졌고, 일부 문장은 600자를 훌쩍 넘었다.
당시 전 씨를 지원한 고효준 나로장애인자립생활주택지원센터 팀장은 "재판장이 원고와 피고가 누구인지, 누가 이겼는지를 전 씨의 눈높이에서 설명하지 않았다"며 "전 씨는 자신의 사건에서 승소하고도 법정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판결을 받는 당사자를 기준으로 설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도적 근거는 마련됐다. 대법원은 올해 1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사법접근 및 사법지원에 관한 예규'를 시행했다. 재판장은 청각·언어장애인과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이 판결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쉬운 판결문'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작성 여부는 개별 재판부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법원행정처는 전국 제공 건수도 별도로 집계하지 않는다. 대법원 장애법연구회 등을 통해 작성 사례를 법관들에게 공유하는 수준이다.
이와 관련 대구지법 관계자는 "현재까지 쉬운 판결문 도입을 위한 별도 지침이나 추진 계획을 전달받은 것은 없다"며 "각 지방법원이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사업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단체는 '쉬운 판결문'이 일부 판사의 관심과 노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지역에서도 관련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과 신청 절차, 작성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문유경 대구피플퍼스트 대표는 "쉬운 판결문이 일부 판사의 관심이나 배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발달장애인이 지역과 재판부에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판결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신청 절차와 작성 기준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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