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지급을 앞당겨 중소 납품업체를 보호하겠다는 국회의 입법이 정작 보호 대상으로 지목된 중소상공인과 플랫폼 입점업체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혔다. 정산 기간을 일률적으로 줄이면 유통기업이 현금 부담을 낮추기 위해 발주부터 줄이고, 판매가 검증된 대기업 상품에 매입을 집중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티메프 사태 재발 방지라는 입법 취지와 달리 유통 현장에서는 중소업체의 판로를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법안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한국중소상공인협회 등 중소상공인·입점업체 관련 단체들은 2일 잇따라 입장을 내고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에 우려를 나타냈다. 중소 납품업체의 자금 사정을 개선한다는 목적에는 공감하지만 지급기한 단축에 따른 유통사의 운전자금 부담과 그에 따른 거래 축소 가능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개정안은 매출 1000억원 이상 유통업체의 상품판매대금 지급기한을 크게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직매입 거래의 지급기한을 현행 60일에서 35일로 단축하고, 백화점 등을 중심으로 활용되는 특약매입·위수탁·임대을 거래는 현행 40일에서 20일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개정안은 지난 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를 통과했다.
중소업체들이 문제 삼는 대목은 지급기한 단축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래구조의 변화다. 유통기업 입장에서는 상품을 판매해 현금을 회수하는 시점과 납품대금을 지급하는 시점 사이의 간격이 짧아지면서 이전보다 많은 운전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현금 부담을 줄이려는 유통사가 매입 규모를 축소하거나 판매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상품의 발주에 보수적으로 나설 경우 신생 브랜드와 중소 납품업체가 먼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회원사 2900여 곳을 두고 있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정산 기간 단축이 납품업체의 단기적인 자금 사정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직매입 플랫폼의 운전자본 부담을 동시에 높이는 문제를 짚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정산 기간 단축이 납품업체의 단기 유동성을 개선하는 한편, 직매입 플랫폼의 운전자본 부담이 증가할 경우 장기적으로 상품 다양성이나 중소 납품업체와의 거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며 "상품판매대금의 지급 기한을 단축하는 방식이 모든 거래구조에서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 만큼, 제도의 목적뿐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향 역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판매 이력이 충분하지 않은 신생 브랜드나 스타트업 상품은 유통기업이 재고 부담과 현금 회수 가능성을 판단하기 상대적으로 어려운 영역으로 꼽힌다. 유통사의 자금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신규 상품 매입이나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운 제품의 취급이 축소될 수 있다는 게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제기한 우려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법안 취지를 살리면서 시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줄이는 보완책 마련도 요구했다. 포럼은 "국회가 법안의 취지를 유지하면서도 시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보다 정교한 보완 방안을 함께 논의해 주기를 요청한다"고 했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역시 지급기한 단축이 중소업체의 안정적인 발주 물량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납품대금을 이전보다 빨리 지급해야 하는 유통기업이 유동성 위험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발주량 자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협회는 "대금 지급기한 단축 강제는 유통업체들의 유동성 부담을 급증시켜, 결국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발주량 축소로 직결된다"며 "중소업체들에겐 며칠 빠른 정산보다 안정적인 발주 물량 확보가 생존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지급기한이 짧아지면 유통기업의 상품 선택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품 판매에 걸리는 기간이 길거나 수요가 불확실한 제품보다는 재고 회전이 빠르고 판매 실적이 검증된 제품을 우선적으로 매입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입점업체 단체들은 이 과정에서 자금력과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대기업 제품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제공된 유병준 서울대 교수 연구팀 등의 분석에 따르면 정산 주기를 20일로 단축할 경우 대형·중소업체 간 양극화 지수가 2.4배 증가하고 중소 납품업체의 시장 피해액은 연간 12조~2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한국중소상공인협회도 개정안에 반대 입장을 냈다. 협회는 "국회는 국내 유통 생태계의 기반을 흔드는 섣부른 입법을 즉각 철회하고, 시장의 현실과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직매입 비중이 줄어들 가능성도 입점업체들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직매입은 유통기업이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직접 사들인 뒤 재고와 판매 위험을 부담하는 구조다. 유통사가 납품업체에 상품대금을 지급한 이후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재고에 따른 부담을 유통사가 떠안게 된다.
반면 특약매입이나 위수탁 거래는 실제 판매 실적과 대금 지급이 연계되는 성격이 강하다. 업계에서는 직매입 대금 지급기한이 크게 단축될 경우 유통기업이 재고와 현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매입을 축소하고 다른 형태의 거래를 늘릴 가능성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특약매입은 직매입에 비해 유통사와의 교섭력 격차가 커, 불공정 거래 행위 발생 빈도가 높아 중소업체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토로했다.
제공된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 수치에 따르면 거래액 1000억원당 불공정 행위 발생 빈도는 특약매입이 44.24건, 직매입은 2.1건으로 집계됐다. 단순 비교하면 특약매입의 불공정 행위 발생 빈도가 직매입보다 21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반품 문제도 거론됐다. 지급기한이 짧아진 상황에서 유통사가 재고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거래방식을 변경할 경우 판매되지 않은 상품의 처리 문제가 납품업체에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지급기한을 법으로 단축하는 방식은 해외에서도 논쟁을 불러왔다. 제공된 자료에 따르면 칠레는 2019년 최대 지급기한을 30일로 제한하는 이른바 '30일 결제법'을 도입했다. 중소기업의 자금 회전을 돕기 위해 지급기한을 단축했지만 시행 과정에서 유통기업의 상품 매입 방식 변화가 문제로 제기됐다.
자료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30일 이내 판매 가능성이 낮은 중소기업 제품의 발주가 줄어들면서 중소기업 제품 구매 비중이 11%포인트 감소했고 납품가격 인하 문제도 나타났다. 이후 칠레는 거래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경우 지급기간을 30일보다 길게 정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마련했다.
유럽에서도 기업 간 지급기한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졌다. 유럽집행위원회(EC)는 2023년 기존 60일이던 정산기한을 30일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 등을 중심으로 업계 반발이 제기됐다. 일률적인 지급기한 규제가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줄이고 대기업 중심 거래를 확대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해외 대형 유통기업의 지급조건도 국내 입점업체들이 제기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제공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아마존과 월마트는 최대 90일, 일본 이온그룹은 최대 60일, 중국 다룬파는 90~120일의 지급기간을 두고 있다. 상품 특성과 거래 형태, 재고 회전기간 등에 따라 지급조건이 달라지는 구조다.
학계에서도 티메프 사태의 원인과 직매입 거래의 지급기한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티메프 사태와 같은 정산 문제를 막는 것과 정상적인 직매입 거래에서 납품대금 지급시기를 일률적으로 앞당기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취지다.
이동일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세종대 교수)은 "티메프 사태는 자금 흐름 관리 실패로 인한 시장 신뢰 훼손이 원인이지, 정산주기 설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티메프 사태의 재발 방지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금 지급기간 자체뿐 아니라 거래 방식과 자금 관리 구조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직매입은 유통사가 상품의 소유권과 재고 위험을 부담하는 거래인 만큼 플랫폼이 판매자를 대신해 소비자 결제대금을 보관했다가 정산하는 구조와 동일하게 다루기 어렵다는 주장도 업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급기한을 하나의 기준으로 일괄 규제하기보다 거래 유형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교수는 "정산의 '속도'보다 거래의 '안정성과 자율성'을 방점에 둬야 한다"며 "유럽 등 해외에서도 기업의 규모와 산업, 특성, 거래 유형에 따라 예외 사항을 폭넓게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를 통과한 개정안을 둘러싼 반발은 지급기한을 얼마나 줄일 것인가를 넘어 유통기업과 납품업체 사이의 거래구조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중소상공인·입점업체 단체들은 납품대금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직매입과 특약매입, 위수탁 등 거래방식별 차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국회에 전달했다.
































댓글 많은 뉴스
경북대 '서울대 10개' 탈락…교육 분야에서도 TK 패싱
부친상 당한 조희대, 법사위 불출석…서영교 '법적 조치' 시사
이진숙, "5·18 유공자 명단 공개·관련 심사 강화해야" [영상]
김천·예천·청도 다 무산…댐 건설도 'TK 패싱' 논란
교체되는 안규백 "푹 쉬고 싶다"…복무이탈 의혹엔 "사실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