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연극리뷰] 진실과 정의가 왜곡되어 '민중의 적'이 되는 시대, 강훈구 각색의 자유분방함<에너미〉× 이준우 연출의 시각적 무대〈에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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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에너미.
에너미.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헨리크 입센의〈민중의 적〉을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가 각색해 2021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에 의해 영국에서 초연된〈에너미〉(서울시극단, M씨어터)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강훈구가 2026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게 윤색하고, 이준우 연출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무대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서울시극단의〈에너미〉는 한 지역의 대형 리조트개발을 앞두고 수돗물 오염을 둘러싼 진실과 정의가 민중의 적이 되는 실체를 현실감 있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연극이다. 그 극적인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와 긴장감이 쏠쏠하다. 지역경제의 이해관계와 정치 권력과 언론의 유착, 자본가의 비대함 등이 가족관계임에도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 권력과 자본, 언론과 정치 유튜버, 대중의 집단적 여론으로 확산되어 진실과 정의가 '민중의 적'이 되어가는지를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이 그려질 정도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배우 문소리가 극 중 인물 커스틴을 맡아 리조트 개장을 앞두고 진실을 관객을 대상으로 폭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민중의 적은, 바로 당신들이 만들고 있지 않나요?" 이 대사가 가슴에 박혀 따끔거리는 연극이다. 에너미(Enemy)는 영어로 '적', '적대자', '원수'라는 의미로, 이 작품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사회의 적으로 규정되는 정치현상의 역설을 말하는 작품이다. 진실과 정의가 정치권력과 자본, 언론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되고, 여론재판과 사법재판의 과정에서도 진실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대중의 여론이 앞서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에너미.
에너미.

◇정치 권력과 유튜브 여론, 철골 구조물에 쌓인 '민중의 적'

이준우 연출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이 된 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서사를 중심으로 무대를 형상화하는 방식보다는 무대의 내·외곽을 확장하거나 공간을 서사 배치로 구조화하지 않는 방식과 미디어와 사운드, 무대 세트와 오브제, 배우의 감각에 더욱 집중시키는 연출의 활용이 늘어났다.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이 된 후에는 연출 방식을 안정적인 시극단의 특성 안에서 전작들보다도 더 과감하게 실험하는 듯해 보인다. 연출의 형식이 한층 자유롭고 유연해졌다고 할까. 서울시극단 전작〈빅마더〉도 AI와 딥페이크, 알고리즘으로 조작된 미국 대선 정국을 뒤흔드는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다룬 작품으로, 이준우 연출은 U자형 유리 컨테이너와 스크린, 카메라, 조명 등을 활용해 60여 개의 장면을 빠르게 전환하고 실시간 촬영과 영상 송출, 몽타주식 장면 구성으로 미디어와 권력이 정보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과정을 시네마틱한 무대로 풀어낸 것이 장점으로 보였다.

특히 영상과 배우의 현존성을 결합한 라이브니스와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는 무대 공간의 활용이 특징적이었다. 두 번째 작품 〈에너미〉는 SNS와 유튜브 생방송, 실시간 댓글과 여론의 확산을 통해 진실이 왜곡되고 개인의 진실과 정의가 공동체의 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무대화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미디어를 서사화하는 연출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무대 형상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무대는 좀 더 넓어지고 무대 공간을 활용하는 시각적 이미지들의 확장성은 한층 과감해졌다고 할까. 강훈구(각색)×이준우(연출)의〈에너미〉콜라보는〈폰팔이〉,〈이상한 어린이 연극-오감도〉,〈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무화과〉등에서 보여준 공놀이클럽 특유의 영 어덜트(Young Adult)의 연극성과 자유분방한 강훈구식 극작 특징을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무대 공간과 서사 구조를 최소화하고 강훈구식 놀이성과 배우들의 감각적 표현으로 장면을 배치하는 표현방식이 〈에너미〉에서도 드러나는데, 강훈구식의 표현성을 이준우식으로 당겨 연출적으로 확장한 느낌이라고 할까.

에너미.
에너미.

◇강훈구의 자유분방한 각색, 이준우의 시각적 무대

단점은 이준우 특유의 침착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장면을 설계해 서사적 논리성으로 무대 공간의 외곽을 확장하는 연출 방식다움이 이번 작품에서 두드러지기보다 강훈구식 각색이 극 전체를 이끌어가면서 이준우 연출다움이 완전하게 극으로 배어든 느낌은 덜하다고 할까. 그러나 한국판〈에너미〉는 두 사람의 협업에 장점도 많은 작품이다. 우선 인물의 관계도와 극의 배경을 현대적으로 전환한 점이다. 입센의 원작에서는 남성 의사 토마스 스토크만과 시장인 형 페테르 스토크만의 대립이었다면, 각색에서는 공중보건 전문가 커스틴( 문소리 분)과 시장인 언니 보니(황영희 분)는 자매 관계로 바뀐다. 원작의 온천 관광도시도 산업 쇠퇴와 인구 감소로 위기에 놓인 영국의 지방 도시가, 온천 개발사업은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로 전환된다. 무대 공간은 아시바 철골 구조물을 활용해 3층 규모의 건물 외형으로 형상화했다. 마치 한적한 시골 도시에 뉴타운을 건설하는 듯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무대는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개발사업을 포퓰리즘식으로 밀어붙이는 보니 시장의 정치적 야망성과 연결되는 구조다. 건물의 구조는 거대하나 텅 빈 철골 구조물 사이로 드러나는 도시의 황폐한 풍경은 개발을 통해 지역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보니 시장의 정치적 구호와 달리, 여전히 쇠퇴하고 있는 도시의 현실과 대비된다. 철골 구조물로 세워진 거대한 무대는 지역경제 회생이라는 시장의 개발 정책 명분으로 작동하는 정치 권력과 낙후된 지역 개발 논리를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두 번째는 지역 시정 소식을 전달하는 유튜버 극 중 인물 앨 리(이강욱 분)을 틱톡 세대도 공감할 만큼 생동감 넘치는 라이브 방송의 감각으로 무대화한 방식이다. 연출 역시 아시바 철골 구조물 무대 전면에 앨리의 유튜브 방송 부스를 배치해 방송 공간과 거대한 건물 구조물을 연결하고, 보니 시장의 정치 권력과 리조트 개발사업을 하나의 무대 이미지로 연결해 시각적 효과적 극대화한다.

정치 유튜브가 여론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인데, 이러한 공간 배치는 정치 권력과 개발자본,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권력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현대사회의 권력 구조를 형상화한다. 일부 정치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사실보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이념적 대립과 확증편향, 진실을 말하기보다 갈등을 확대하거나 여론의 흐름에 편승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여주는 익숙한 풍경이다. 앨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ALY LIVE IS LIVE'를 〈에너미〉의 극적 동력을 전환하는 연출적 장치로 활용하면서 리조트 개발사업을 둘러싼 정치 권력의 홍보와 수돗물 오염을 둘러싼 여론의 변화, 진실이 왜곡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실시간 방송의 형식으로 풀어내 현실사회의 익숙한 풍경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장점이다.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절차적 논란이 감독 개인을 향한 비난으로 확산 된 현상이나, 가수 김건모를 둘러싼 의혹 제기로 여론이 형성되고 변화했던 과정도 떠올리게 한다. 일부 유튜버들이 제기한 의혹들이 충분한 사실 확인을 거치기도 전에 온라인에서 퍼지며 특정 인물을 집단적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현상을 소환시키는 연출적 장치가 유튜브와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들이 미디어 소비하는 방식을 활용한 점도 괜찮아 보였다.

에너미.
에너미.

◇진실과 정의가 '민중의 적'이 되는 시대

연극〈에너미〉의 하이라이트는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의 개장을 앞둔 장면이다. 커스틴(문소리 분)이 딸 페트라의 절대적인 응원 속에 수돗물 오염의 진실을 폭로하려 하지만, 보니 시장과 기자 베니(마두영 분)의 유착관계로 커스틴의 주장이 왜곡되고 여론전으로 확산된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보니는 워터파크 '빅 스플래쉬'의 개장을 강행한다. 연출은 이 장면을 마치 강남의 한 클럽에 온 것처럼 화려한 조명과 강렬한 사운드로 극의 분위기를 전환한다. 수돗물 오염이라는 중대 사안을 축제의 열기로 덮어버려 대중의 관심을 진실의 규명보다 축제의 열광으로 돌리려는 정치 권력의 여론 조작 방식을 극적으로 형상화했다. 국풍 81등 정치적 축제들을 떠올리게 했는데, 특히 무대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 사이사이 빈 곳을 '빅 스플래쉬' 리조트의 홍보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으로 채워, 마치 대형 광고판처럼 리조트의 시설과 장점들을 시각적으로 부각하는 연출성도 돋보였다. 이 장면은 수돗물 오염이라는 심각한 현실을 화려한 개발사업의 이미지로 덮어버려 대중의 시선을 진실보다 리조트 개장이라는 지역경제와 상권의 기대심리로 여론을 전환하려 하는 이미 우리가 학습한 여러 정치 권력의 현실 같은 여론전을 소환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은 왜곡된 여론에 밀린 커스틴이 워터파크 개장식에 등장해 지역의 수돗물 오염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폭로하려는 장면인데, 연출은 마치 진실 고백 스탠딩 토크쇼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커스틴은 '진실과 정의를 왜곡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을 오히려 '민중의 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아닐까'라고 시민들을 향해 외치면서 "여러분을 아프게 만드는 건 정치인이 아닙니다. 언론도 아니고요. 유튜버도 아니고요. 돈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여러분입니다."라는 대사를 쏟아내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고 정치 권력과 언론이 만들어 낸 마녀사냥식 대중의 집단적 책임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극 중 장면 뒤에 무대 뒤편 거대한 철골 구조물 공간은 커스틴이 폭로한 진실이 다시 왜곡되고, 진실을 밝히려는 한 개인이 집단적 공격의 대상이 되는 수백 개의 댓글 창으로 전환된다.

진실의 실체보다 익명의 댓글이 여론전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되어 진실과 정의가 오히려 민중의 적이 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장면인데, 아마 이준우 연출이 〈에너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함축된 장면이다. 여론도, 유튜브 방송도, 첨단 미디어도 진실을 왜곡하는 일부 사회현상을 넘어 왜곡된 여론을 진실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키는 대중 역시 또 다른 '민중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수많은 진실 왜곡 댓글을 통해 시각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연출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강훈구가 〈에너미〉를 2026년 한국사회의 현실로 전환한 작품에서 이준우 연출 특유의 영상과 미디어를 활용한 시각적 효과에 비해 수돗물 오염사건과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의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커스틴과 보니 자매 사이에서 형성되는 갈등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서사적 밀도는 다소 떨어져 극적 긴장감이 완화된 점(특히 커스턴이 개장식에서 진실을 폭로하는 장면까지의 서사적 완충)은 아쉽다. 극 중 인물의 관계도가 가족관계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이준우 연출은 한국판 〈에너미〉를 통해 SNS 댓글, 유튜브 생방송 등 디지털 미디어를 극적 장치로 활용해 진실을 밝히려는 개인이 오히려 민중의 적으로 전락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해 감각적으로 시각화했다. 이날 커스틴은 문소리 배우가 연기했는데, 이봉련 배우의 커스틴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황영희 배우의 보니 역은 소리나 연기에서 안정감이 높고, 강신구의 데릭은 극 중 장면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있어 보약이다. 유튜버 앨리의 존재감은 현실 그대로의 인플루언서 스타일을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진실을 취재하다가 정치와 타협하는 기자 베니의 톤이 다른 배우들의 연기 밸런스와 비교해 약간 튄다는 점인데, 배우들의 연기로 쌓이는 장면 흐름 몰입감이 높은 한국판<에너미〉이다. 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에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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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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