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철이 만난 사람] 나춘호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

나춘호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 이무성 객원기자
나춘호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 이무성 객원기자

스물다섯살 청년 나춘호는 1967년 3월 1일 오후, 대구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3년간의 공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주머니에는 군대 동기의 서울 집 전화번호, 그리고 틈틈이 모아뒀던 2만원이 들어있었다.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달성군 화원이 고향인 그는 가난이 싫었다. 배움의 기회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시골 마을의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결론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서울 하숙집에 함께 살던 이웃의 권유로 우연히 들어서게된 월부 책장사의 길. 그는 그 길부터 열심히 걸었다. 나춘호는 매일매일이 벼랑끝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살이를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탄지 5년만인 1973년, 나춘호는 그동안의 책판매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사인 예림당을 설립했다. '달성 촌놈' 나춘호가 마침내 출판사 사장이 된 것이다.

그는 사장이 됐지만 대구역을 떠나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았다. 좋은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이 없다고 했던가. 예림당의 초등학습만화 'Why' 시리즈는 지난 6월 기준으로 발간 17년만에 7천6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대한민국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예림당은 국내 최대 출판사의 반열에 올랐다.

예림당은 2009년 코스닥에 상장했고 여세를 몰아 2013년엔 티웨이항공을 인수, 출판업을 거쳐 항공사업에까지 진출했다. 티웨이항공은 국내 저가항공 최다인 9개국 47개 정기노선 및 110개 부정기노선을 확보하는 등의 뛰어난 실적을 발판으로 지난 1일 유가증권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했다.

서울 성수동 예림당 사옥에서 들어본 나춘호(76)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의 인생 이야기. 베스트셀러 한권을 읽는 기분이었다.

-군대 동기 전화번호 하나만 믿고 전역한 바로 다음날 대구를 떠났다. 무작정 서울로 갔는데 겁이 나지 않았나?

▶6'25전쟁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시절 모두가 가난했듯이 우리집도 넉넉하지 못했다. 말이 나면 제주도로,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했던가. 기회가 없는 시골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무작정 부딪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동기가 여관을 했는데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른바 '청량리 588' 동네였다.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또다른 군대 동기의 소개로 다른 하숙집을 알게 됐다. 1960년대 후반, 서울의 허름한 동네 하숙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다. 그 중에 월부 책장사 한명이 있었다. 그의 소개로 우연히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나는 수금 업무를 맡았다. 그것이 나의 출판 인생 시작이었다.

-1960년대 후반, 책 판매업이 잘됐나?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은 경제개발이 조금씩 이뤄지면서 단독주택 붐이 불기 시작했다. 책꽂이를 들여놓고 책을 꽂아놓는 바람도 함께 불었다. 유행을 타면서 책이 잘 팔렸다. 수금은 물론, 영업까지 나는 잘 해냈다. 그러던 나를 출판사 대표가 어느날 부르더니 "자네가 이 회사를 맡아 운영해보라"고 했다. 내 출판사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때 출판업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게됐다. 몇해를 뛰어보니 소비자들이 어떤 책을 원하는지를 알게 됐다. 나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말한다. 젊은이들이 자꾸 대기업 들어갈려고 하지 말라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소속된 부서의 업무만 알게되지만 작은 회사에 들어가면 훨씬 더 많은 업무를 알게된다. 그 당시 내가 그랬다. 출판사에 관한 모든 것을 익혔다.

-상경 5년만에 창업을 했는데, 비교적 일찍 자리를 잡은 것 아닌가?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많이 배웠지만 책임지고 운영했던 출판사를 결국 그만뒀다. 내가 주인도 아닌데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내 출판사, 예림당(예림은 예술의 숲이라는 뜻)을 설립했다. 서울 생활 몇년만에 30만원을 모았는데 그게 밑천이었다. 30만원으로는 부족했다. 알고 지내던 서점 점주들에게 부탁해 책을 나중에 주겠다고 약속한 뒤 선어음을 받는 방법으로 70만원을 더 모아 100만원의 창업자금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 돈으로 출판사를 시작했다. 서울 생활 몇년동안 전국 서점 점주들과 쌓아놓은 신용과 유대 덕분이었다.

-적잖은 경험을 갖고 예림당을 설립했는데 출발부터 성적이 좋았나?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출판시장을 보니 어떤 책이 잘 팔릴 것인지가 보였다. 나는 어린이들한테 맞는 책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다. 고교 미술 선생님께 부탁해 그림을 받아 동물책을 만들고, 그림을 통한 한글 공부 및 숫자 공부 책을 만들었다. 1970년대 경인'경부고속도로가 잇따라 뚫리면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에 발맞춰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책도 만들었다. 각종 자동차'기차 사진을 구하기 힘들어 내가 전국을 직접 다니며 사진을 찾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 맞는 한국적인 책'이라는 내 출판 전략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1980년대 들어서는 어린이책 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예림당 매출은 급성장했다.

-실패 없이 사업을 꾸려온 것을 보면 사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가보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세상의 모든 것이 어렵겠지만 사업 역시 항상 어렵다. 다른 사람 하는 거 비슷하게 하는 것은 안된다. 아직 세계에 선보이지 않을 것을 해야한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사업이다. 일흔이 훨씬 넘었지만 나는 지금도 연구하고 직접 기획안을 만든다. 1985년에 국내 최초로 오디오 북 형태를 만들었고, 1990년에는 사운드북을 개발해 특허를 취득했다. Why 시리즈는 7천600만부를 팔았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어른들도 본다. 세계적 기록을 세운 책이다. 기네스북 감(예림당의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50년전 출판된 수학의 정석인데 2016년 기준으로 4천500만부가 팔렸다)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한다. 남이 해놓은 것, 기존에 있는 것, 따라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업가들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출판은 정직하게 하다보면 자칫 실패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좋은 책을 고집하다보면 이익이 따라오지 않을텐데?

▶나도 유혹이 많았다. 외국 책 사다가 적당히 베껴놓은 전집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내가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6년에 걸쳐 했다. 감투까지 쓰고 있었지만 수익이 많이 나는 교과서 출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먹을 게 없어서 나무껍질까지 먹어봤다. 돈을 더 벌려고 하면 남부끄러운 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적은 이익에도 만족할 수 있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도 필요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단행본 동화책을 기획하면서 "왜 우리나라는 안데르센같은 동화작가가 없나"라고 생각했다. 이원수·윤석중 선생 등 아동문학가들에게 의뢰해 우리 창작동화를 펴냈다. 당시 원고료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원고료를 원고 1매당 1천원씩 드렸다. 우리 아동문학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적은 것에 만족할 줄도 알고, 보람있는 일에도 정열을 쏟았더니 실패보다는 성공이 항상 먼저 내 앞에 다가와있었다.

나춘호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 이무성 객원기자
나춘호 예림당·티웨이항공 회장. 이무성 객원기자

-지금 돌아보면 성공의 길이었지만 말 못할 고통도 많았지 않나?

▶피나는 고생길이었다. 집을 나오면서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몸도 많이 망가졌다. 새로운 기획을 위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나는 일단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를 한다. 내 스스로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평생을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쳐버릴까봐 자다가도 일어났다. 아직까지 그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2013년엔 티웨이항공을 인수했다. 출판업에서 왜 항공사업까지 도전하게됐나?

▶우연한 기회에 이 항공사를 알게됐고 인수하게됐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항상 미래를 읽을 수 있어야한다. 4차산업시대에 걸맞는 사업이 항공업이다. 나는 대주주이지만 항공사업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다. 전문 경영인 사장을 모시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경영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일 상장도 했다. 상장을 바탕으로 더 큰 규모의 항공기를 도입하고 기존 20대의 비행기 댓수도 더 늘릴 것이다. 국내 저가항공업계 1위를 목표로 전문 경영인과 협조해 회사를 더 키울 것이다.

-티웨이항공 덕분에 대구공항이 크게 활성화됐는데?

▶아주 기분좋은 일이다. 내가 대구 사람이고,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군복무시절 대구 K2 비행장에서 만 3년을 근무했다. 대구가 항공 중심 도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티웨이항공 자료를 보면 대구공항은 티웨이항공의 확고한 거점공항이다. 티웨이항공의 지난해 기준 대구공항 점유율은 국제선이 무려 57%이고 국내선도 31%에 이른다). 나는 고향을 잊지 않고 있고, 고향을 위해 뭘 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

-나 회장의 고향인 대구 달성군은 인구가 매년 늘어나는 곳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않나?

▶그렇다. 내 고향 달성은 인구 증가율이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러니 어린이도 많다.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서울에서 워낙 고생하면서 살다보니 이제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재임 때부터 대구와 달성군 지역 초교에 2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바 있다. 매일신문이 도와준다면 많은 어린이들이 예림당의 책을 볼 수 있도록 책을 기부하는 활동을 많이 하고 싶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출향인으로서 대구를 위해 해줄말이 있다면?

▶내가 본 대구는 특징이 없는 도시다. 교육도시인가? 아직도 섬유도시인가?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을 빨리 찾아야한다. 그리고 인재를 길러내는 전략과 기술이 필요하다. 대구경북에서 우수한 인재를 키워내고 길러낼 수 있는 토양을 만들면 지역이 바뀐다. 앞으로의 인재는 어정쩡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는 안된다. 세계에 나가 겨룰 수 있는 인재가 되어야한다. 대구경북은 너무 작은 지역이라서 안된다는 핑계는 이제 안 통한다. 지난 월드컵을 한번 보자. 정말 작은 나라 크로아티아가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갔다. 작은 나라라서, 작은 지역이라서 안된다는 것은 이제 성립할 수 없다. 대구경북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대구경북이 현장형 인재를 잘 길러내야한다. 고교 때부터 기술을 연마한 학생이 박사학위까지 따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내야한다. 이런 인재가 나올 수 있다면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예림당 책이 11개 언어권, 약 45개국에 수출돼왔다. 세계 시장에서 겨룰 수 있는 콘텐츠가 나와야하고 나는 항상 이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일해왔다. 대구경북도 인재 양성을 통해 세계를 바라봐야한다.

-평생동안 책을 만들어왔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 책을 통해 새로운 생각, 또다른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항상 다가올 미래를 보고 책을 펴냈을텐데 앞으로 세상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되나?

▶내가 경기도 여주에 식물원을 갖고 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박물관 문화가 발달돼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 사람들은 각지로 많이 다닌다. 체험하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박물관도 많다. 식물원도 일종의 박물관인데 각광받는 시설이 벌써 되고 있다. 내가 새로 시작한 항공사업도 앞으로의 조류에 맞는 사업이다. 4차산업 얘기를 많이 하는데 새로운 4차산업시대에 걸맞는 산업토양이 어떻게 갖춰질지를 잘 살펴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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