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50)

그날, 그는 나에게 저녁도 사 주고 서점엘 데리고 가서 릴케의 시집과 밀란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사 주었다. 아마 언니가나의 꿈에 대해 귀띔해 주었던 모양이었다.[언니는 복이 있나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밤10시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내가 언니에게 말했을 때 언니는 [그러니] 하며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었었다.그리고 또 한번은 은유와 함께였다. 겨울 방학 때였는데, 도시에선 보기 드물게 숫지게 눈이 내려 있었다. 은유와 함께 학원엘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날씨도 포근하고 눈이 있어 마음이 달떴는지 은유가 걷자고 해서 타박타박 걸어 오다가 언니 애인이 근무하는 은행 앞을 지나오는데 먼저 알아보고우리를 불러 세웠다. 누굴 만나고 들어가던 길인지 그의 손에는 아이보리 빛깔의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처제?]

그는 보기보다 당돌해서 그 무렵에는 내가 언니 대신 전화를 받을 때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놀란 건 은유였다. 내가 알속해 주자 은유는 동그랗게 눈을 치뜨고 더욱 유심히 지켜 보았다.[학원 갔다 오는 길이야?]

은행 앞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그는 허옇게 웃고 있었다.내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눈이 좋아 걸어오던 참이라고 하자, 처제는역시 시적이라고, 스스럼없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안녕하세요. 승혜 친구 박은유라고 합니다]

은유가 깎듯이 인사하자 마치 고객을 대하듯 허리를 굽힌 그는 우리에게 잠시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곤 은행문을 밀고 들어갔다. 은유는 승희언니 애인이 핸섬하고 세련되었다고 법석을 떨었다. 나는 공연히 기분이 좋아 은행 앞도린곁의 숫눈을 끌어모아 허공으로 날렸다. 하얀 알갱이로 부서진 눈가루가 햇살에 부딪쳐 반짝이며 우리의 머리 위로 축복처럼 내려 앉았다. 잠시 후빈손으로 내려온 그는 우리를 지하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주었다. 입장이 좀그런 자리여서 은유가 머뭇거렸지만 [어떠니?]하며 내가 은유의 팔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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