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게 좋은 것'이라는 다소 독특한 좌우명을 갖고 있는 민자당의 대구시장후보 조해녕씨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청렴성과대쪽같은 분명함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그와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구시장 자리를 끝으로 고향에 내려갈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하지만 상황은 그의 희망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민선시장 후보를 맡을 만한 인사가 없었고 운명은 자신에게 책무를 지웠다.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민자당후보 공천을 받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고위직에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힘이 들어 공직을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다.25년 공직을 포함해 53년간 인간 조해녕이 살아온 궤적을 추적해 본다.〈성장과정과 학창시절 〉
경북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그가 고향집 과수원 일을 돕고있던 중 10년생 묘목을 옮겨 심는 작업을 하다 일이 지루하기도 해서 구덩이를덜 판 상태에서 묘목을 잡아 당기다 큰 뿌리를 부러뜨리게 돼 결국 묘목은 못쓰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이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충격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떤 일이라도 대강대강해서는 안되고 철두철미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향은 경산군 와촌면덕촌리다. 1943년11월4일 만여평의 과수원을 하는 부잣집 3남3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살림이 넉넉했던 관계로 초급사무관 시절까지 부친은 살림을 보조했다고 한다. 아들이 '엉뚱한' 데 신경을 쓰지 말라는부친의 배려에서였다.
학창시절 그는 수영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한 해 일찍 학교에 들어간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시절 단구였음에도 한 때 평영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시절 서울대 수구팀 주장도 했고 법대산악회 일원이기도 했다. 지금도 산에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가장 가깝다. 얼마전 UR관계로 과로로 순직한 김정룡농림수산부차관보와 정정길서울대행정대학원장 등이 그들이다. 김차관보의 죽음을 그는 "내 반쪽이 찢어져 나가는 아픔이었다"고 표현했다. 지금도 이때 친구들을 만나면 밤새 통음을 한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조해녕은 개구쟁이 그 자체였다. 공부만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만능 모범생이었다. 또 유도유단자인데다 검도도 했다. 때문에 "대학시절 간혹 싸움도 했다"며 "자주하지는 않았지만 걸려오는 싸움을 피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한다.그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은 학생운동 경력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그는 4·19의 도화선이 된 2·28을 몸소 체험했다. 그리고 대학시절 한일국교수립반대 문제로 빚어진 6·3사태의 주역으로 6인 수배대상중 한사람이었다.결국 그는 구속되기에 이르렀고 2개월여를 구치소에서 보내야 했다. 공소취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후 방황의 시간도 보냈다. 고시도 동기들보다 4년정도늦었다.
〈가족관계와 가정생활 〉
부인 김옥희씨는 그와 와촌국민학교 동기동창이다. 효대약대를 나온 약사다.장인은 고인이 된 김병찬 전경북대 법대교수다. 김교수는 부친 조광호씨와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그는 두사람의 관계를 '관포지교(관포지교)'에 비유했다.집안간에 왕래가 잦았고 결혼도 자연스레 하게됐다는 설명이다. 결혼 직후 장인으로부터 '법대를 나왔으면서 고시에도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앞에 나타나지마라'는 '모진'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71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장인과 특이한 기록도갖고 있다. 김교수는 교직에 있기전 관직에 있었다. 첫 부임은 영양군수였다.그리고 사위도 첫부임을 영양군수로 했다. 부자간도 아니고 장인과 사위가 한곳에서 고을원을 지낸 유일한 예라고 한다. 그의 장인은 94년 세상을 떠났다.당시 그는 중국방문중이었다. 중간에 귀국하지 않고 그는 대표단을 이끄는 단장의 업무를 다하고 돌아왔다. 공사구분은 '칼'같다는 것이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는 지금 처가에서 지내고 있다. 대구에 집이 없기 때문이다. 양친과 조모는 황금동의 2층 전세집에 살고 있다. 재산대부분(당시 19억원)을 84년 동생의사업실패로 잃어버렸다. 서울에 살고 있던 집마저도 잃었다. 사업을 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지금 살고 있는 23평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손꼽을수 있는 재산목록에도 그 아파트와 고향의 임야밖에 없다.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큰 딸(기정)은 대학졸업후 아버지의 선거참모 노릇을 하고 있고 아들(석주)은 대학원재학중이다. 특히 석주군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90년 시위로 구속된 적이 있다. 아들의 구속에 대해 그는 "젊고순수한 정열의 발로"라며 "학창시절 그 정도의 정열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했다.
그는 공직생활 25년간 한번도 상사의 집을 찾아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 줄 잘서고, 로비를 잘해서 좋은 자리를 맡은 적은 없다고자신있게 이야기한다. 일이 자신을 필요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청탁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도 청탁이나 로비를 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지켜왔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공무원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일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잇다. 얼버무려서도 안되고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대구시기획관리실장 직후 부임했던 창원시장 시절 노사분규를 설득으로 막아내는 결연함도 갖추었다는 평이다. 또 6공시절 청와대에 있으면서 광역의원선거를 준비, 집권당의 승리로 이끌어 정치적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도기억할 만한 일이다.
그는 또 대구출신 공직자로는 특이하게 최형우전내무장관과 사이가 각별하다. 최전장관이 장관으로 부임할 때 그는 내무부기획관리실장이었다. 최전장관에게 그는 공무원 복지부동의 원인이 사기저하와 무조건적인 사정에 있다며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 호평을 받았다. 그후 최전장관은 그의 후견인이었다.그러나 최전장관과는 민주산악회문제로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장재임시절 그는 8시에 출근, 6시퇴근을 거의 지켰다고 한다. 부하직원들도 퇴근을 종용했다. 앉아 있기만 한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에서다.5시50분이 넘어서는 결재서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의 권한을 대폭 부시장과 국장으로 넘겨줘 결재서류가 쌓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그의 공직생활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7대3 내지 8대2정도다. 업무능력과 공직자세에 있어서는 호평을 받고 있다. 또 친화력도 갖추고 있다. 공사가 분명하고 청렴한 것도 그의 장점이다.
다만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않는 점도 두고두고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고집이 세서 지난해 대구시당정협의 석상에서 김용태 당시 국회예결위원장과 입씨름을 벌이며 자신의 주장을 강변한 일화도 있다.
한편 남의 자리에서 장황한 연설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몸'이 너무 가볍다는 지적도 자주 받는다는 것이 대구시청직원들의 이야기다.또 고시출신우대라는 잡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지적에 대해 고시출신우대가 아니라 '능력우선주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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