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역전경주는 1957년 들어 대구~안동간으로 구간이 바뀌며 경기성격도 학교대항에서 시군대항으로 바뀌었다.역전경주가 시군대항전으로 바뀌자 육상외에 뚜렷한 운동경기가 없던 당시각 시군의 경쟁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그만큼 대회에 얽힌 일화도 가지가지.
11월2일부터 3일까지 이틀동안 벌어진 제1회 경북도내 시군대항 대구~안동왕복역전경기대회는 대구에서 안동간을 12구간으로 나눠 왕복 24구간을 달렸다.
갑작스레 구간과 대회성격이 바뀐 탓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않아 대회개최부터 해프닝이 일어났다.
박만태씨 등 육상연맹관계자들은 초행길의 대회구간을 단 하루만에 답사하면서 편의대로 구간을 나눴고 어림짐작으로 대회예상기록까지 작성했다.여기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생겼다.
주최측의 예상기록이 실제 1위기록과 1분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에 대해 박만태씨는 "각 선수단이 주최측의 예상기록을 토대로 작전을 짜경기에 임한 때문이지만어쨌든 현재의 장거리경기 기록오차에 비해도 놀라운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부정선수소동이 일어나는가하면 주최측이 꼴찌주자를 차에 태워 구간골인지점 바로 앞에서 내려놓는 일도 벌어졌다.
부정선수시비는 각팀순위가 나오고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 발생했다.이틀간의 경주결과 성주 경산 달성 예천으로 순위가 드러났지만 성주군 소속선수 가운데 당시 대구에서 합숙훈련중이던 육군특무대팀 선수가 뛰었다는 이의가 제기된 것.
대구역앞에서 열린 폐회식에서는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돌아 결국 시상식은연기됐고 성주군팀은 실격이 되고 말았다.
참가팀간의 엄청난 실력차가 빚은 웃지못할 해프닝.
고령군의 경우 선두그룹이 구간을 완주할때쯤 겨우 중간지점을 달리는 형편이어서 대회운영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보다못한 주최측은 고령군선수를 지프에 태우고 신나게 달려 골인지점 바로앞에서 다시 달리게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마지막 코스인 칠곡~대구역구간에서도 웃지못할 장면이 발생했다.이 구간에서는 달성군의 선수가 1위로 골인했는데 연도의 시민들은 당연히달성군이 우승한 줄 알고 박수를 아끼지 않은 것.
역전경주가 구간별로 나눠져 벌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던 당시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 달성군은 종합성적에서 3위에 머물렀다.
이같은 숱한 해프닝 속에서도 대구~안동간 시군대항 역전경주는 계속돼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경북각지의 육상열기를 체계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957년에 일어난 또다른 육상계의 일화.
1956년 서울서 열린 제37회 전국체육대회에 처음으로 선보인 성화는 이듬해인 38회 부산대회때도 계속돼 강화도에서 부산까지 성화봉송이 이뤄졌다.추풍령고개를 넘은 성화는 김천고 육상부원을 시작으로 경북지방을 관통해달렸다.
당시로는 구경나온 시민들은 물론 들고 달리는 선수마저 성화에 대한 상식이없던 때.
성화가 대구에 들어올무렵 몰려든 관중들은 자주보던 마라톤대회로 착각, 성화가 지나간 후에도 "2등이 올때가 됐는데"하며 한동안 기다렸다는 것.일부 시민들은 성화를 들고 달리는 선수들을 보고 "저것은 서양식 마라톤으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골인해야지 꺼뜨리면 실격이다"며 나름의 해석을 늘어놓기도 했다.
한편 역전경주 등을 통해 지역고교 육상부가 활성화돼 우수선수들이 쏟아지자 지역대학들도 자연 강세를 띠게 됐다.
1953년 박만태씨가 체육부장을 맡은 대구대에는 영남 계성 대륜 등을 졸업한기라성같은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단거리전국최강 엄팔룡을 비롯, 이이재 송희원 오문섭 김창식 이정혁 등이줄지어 포진, 창단하자마자 전국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뒤이어 김정한 손경수 천태화 이병태 김태훈 등이 입학하자 대구대 육상부는장거리와 단거리, 필드를 가리지 않고 명실공히 전국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게됐다.
이들이 활약한 대구대는 1953년부터 약 5년동안 전성기를 누리며 향토육상의명성을 높였다.
10종경기를 하던 김경룡를 주축으로 한 경북대육상부도 50년대중반 상당한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종해 최성근 등의 선수들은 육상뿐만 아니라 축구 럭비 등 종목을 가리지않고 종횡무진 활약, 경북대 육상의 밑거름을 쌓았다.
현재 경북대 육상부를 지도하는 김영환교수(체육과)의 설명."50년대 후반 이들의 졸업으로 경북대육상은 쇠퇴의 길을 걷지만 그때 닦인기초는 60년대 중반 서명규 오성진 등에서 되살아나 80년대 전종환 90년대 김순형 이진택 등 육상스타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됩니다. 침체한 지역육상의 현상황도 이처럼 끊어진 지역육상의 맥을 하나하나 잇는 노력에서 풀려나갈수 있다고 봅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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