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 기획취재 시리즈-동산백원

남목청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계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믿고지원하던 중국 국민당 관계자들에게도 엄청난 실망을 줬다. 임정 후원을 전담하다시피 하던 중국측 실력자 진과부는 아예 지원 업무에서 손을 떼 버리기까지 했다.이런 와중에서 일본군의 공격이 또 장사에까지 밀려왔다. 7개월간 머물던이곳에서마저 떠나야 할 형편이 된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는유랑길을 앞두고 이때 임정 세력은 심지어 베트남까지 피난 갈 생각을 할 지경이었다고 정정화의 '녹두꽃'은 회고하고 있다.

임정측이 장사를 출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57년 전인 38년 7월12일이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옮겨가 있던 중경에 안착하기까지 1년을 유랑하게된다.

대식구는 우선 광주로 향했다. 광주는 중국의 최남단에 위치해 일본군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장사를 기차로 출발한 일행은 5백60㎞를 달려 당일저녁 광주에 도착해 '동산백원(동산백원)' 등 두곳이상에 나눠 짐을 풀었다고 조경한선생의 '백강회고록'은 적고 있다.중국 개항의 통로

광주 얘기는 이미 한 적이 있지만, 이를테면 우리의 부산이나 인천같이 개항기 중국의 서구 문물 유입 통로 구실을 한 도시였다. 그 덕분에 일찍부터진보적 사상이 움터 중국에 혁명의 바람을 불어 넣는 송풍기 같은 구실을 하기도 했다. 손문선생이 태어나 활동하고 새 정부를 세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그에 앞서서는 중국에 개혁의 바람을 몰고 온 '태평천국의 난'의 주인공홍수전도 이곳에서 태어났고, 중국 공산당의 유명인물 엽검영도 이곳 출신이다.

취재팀이 찾은 광주는도심 3백30만명에 교외까지 합쳐 6백8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였다. 하루 유동인구가 3백만명에 달한다는 중국인 가이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역앞에는 기차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이루고 있기도 했다.

기자는 어느해 3월 일본 북해도에서 '설국(설국)'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있었다. 이곳 중국 광주에서는 처음으로 '남국(남국)'이라는 것이 이런데를말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교외를 조금 벗어나자 마자 곳곳에 사탕수수와 바나나 밭이 늘려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앞선 도시라서 그런지 가이드는 이곳 농부들 월 수입이 중국돈으로무려 1만원에 달한다고도 했다. 우리돈으로 1백만원쯤 될 이 액수는 중국인의 일반적 수입과는 비교가 안되는 거금이다. 흔히 중국은 우리보다 못산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짧은 소견이 얼마나 한국적인 것이고 위험할 수 있는가를 경고하는 대목일 터이다.

또 광주는 중국의 최첨단 도시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역사가 무려2천8백년이나 된다는 얘기도 놀라웠다. 이러한 역사 위에 24년도에 손문선생에 의해 중산대학과 육군사관학교(황포군관학교)가 함께 세워지고, '중국의아버지'인 그를 기리는 중산기념관이 또 들어섬으로써 역사가 더욱 빛나고있는 것이었다.

잊혀진 청사자리

이렇게 찬란한 광주이기에 이곳에 의탁했던 우리 지사들의 거처 자리는 더욱 초라해 보였다. 당시 임정 청사로도 쓰였다는 동산백원은 아마도 제법 큰집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1백평 남짓한 소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광주시동산구 구청에 인접해 있는 이곳은 이제이름도 '동산공원'으로 바꿔 달고있었다. 1백평 터에 빙 둘러 간이 가게들이 들어서고, 복판 공터 50여평에노인들이 무료히 앉아 부채질하는 것이 오늘의 형상이었다. 노인들은 "이곳에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던 사실은 알지만 한국 임정이 있었음은 들어보지못했다"고 했다. 취재팀 조차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 괜히 물었을지라도,돌아오는 대답에 또한번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임정 자리 빼앗는걸 목적 삼기라도 했던듯 일본군은 뒤따라 또 광주마저점령, 임정은 3개월만에 다시 이곳을 떠나야 했다. 지금까지는 상해에서 항주-남경-장사-광주로 남하하는 길이었지만, 이제는 내륙으로 되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됐다.

첫 지향점은 유주(유주)였다. 유명한 시인 유종원(유종원)이 책임관으로부임해 지역을 잘 다스렸다는 인연 때문에 그를 토주신으로 받들고 땅 이름, 강 이름 조차 그의 성을 땄다는 이 도시는, 경치로 이름 난 계림과 같은성(광서성)에 속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겨울을 난 임정 식구들은 다음해인 39년4월 최종 안착지인 중경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유주에는 한 6개월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당시 중경은 중국정부의 임시 수도여서 그쪽에 의지해 돈을 얻어 쓰고편의도 제공받는 임정으로서는 그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백범선생 등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중국 정부와 접촉을 하고있기도했다. 대식구가 옮겨 가게 된 것도 거처할 곳 등에 관해 백범선생 등이 중국 정부와 미리 얘기가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거쳐 온 여러 도시들도 모두 중국정부의 지원 약속에 의지해 오갔었다.

중경에서 처음 거처를확보한 곳은 기강(기강)이라는 곳이었다. 중경에서도 남쪽으로 70여㎞ 떨어진 곳이다. 지금 행정구역은 중경시 기강현.이곳에서 임정은 다시 40년도 새해 설을 쇠지만, 3월에 민족의 큰 어른 석오 이동녕선생을 잃었다. 향년 71세의 석오선생은 천안 독립기념관 바로 옆마을 출신이다. 김구선생보다는 7살, 이승만보다는 6살 위인 선생은 23세에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27세때부터 3년간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감방에서 이승만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이후 38세 때(1907년)당시 민족운동의 총합체였던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총서기로 활약했고, 신간회 계획에 따라1910년 망국 후 곧바로 만주 서간도로 들어가 신흥강습소소장을 맡았으며, 이때쯤 헤이그밀사 이상설선생 등과 긴밀히 협력했었다.쓰러지는 거목들

3.1운동 후 신규식선생의 안내로 상해로 건너가 임정의 전신인 독립사무소를 설치하고, 연이어 국회(임시의정원)초대 의장을 맡아 임정 수립을 주도했다. 또 임정이 선 후에는 내무부장관(내무총장)이 돼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없는 상황(미국과 소련에 있었다)에서 임정 살림을 거의 도맡아 살았다.그 뒤 27년도부터는 임정의 주석으로서 큰 어른 역할을 계속해, 백범선생이가장 소중히 모시던 분이었다.

그외 이즈음에 백범의 어머니도 세상을 떴으며, 조소앙선생의 부모도 남의 땅 기강에서 세상을 버렸다. 곧이어 송병조(송병조)선생도 뒤를 따랐다.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고 고국 떠나 낯설고 물 선 중국까지 와 갖은 고생 다 겪은 어른들이었다. 그러고도 고생이 모자라 일본군 피해서 중국 천지를 떠돌아야했던 유랑생활이 이제야 끝날 즈음, 그리고 불과 5년만 더살았더라도 천추에 한맺힌 조국 해방 소식이나마 들을 수 있었을 그 어른들이 바로 그 즈음에 세상을 등진 것이었다.

백범선생은 그의 '일지(일지)' 말미에 이렇게 조국을 위해 고생한 분들의얘기를 별도로 적은 뒤 후인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 남기노니,나라를 되찾거든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그의고향에 세우고 영구히 기념하게 하기를 부탁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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