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인 앞잡이가 독립운동가라니..." '스글픈 현실'에 방랑의 삶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번듯한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마지막 남은 소원입니다"광복 50주년 대일수교30주년을 맞은 노(노)독립운동가는 삶과 병마에 지쳐 있었다. 10대에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서 공작대(공작대)로 활약한 홍재원씨(78.대구시 달서구 상인동)는 굴곡많은 우리현대사를 보듯 파란많은삶을 이어 왔지만 월 35만원 남짓한 연금과 때늦게 받은 훈장이 삶의 궤적이다.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홍씨는 춘천농업학교 1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당시17세이던 1936년에 "중국에 가면 취직시켜 주겠다"는 아버지친구 독립군의말을 믿고 따라 나선 것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16세에 결혼한 홍씨는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수만리 장정에 나서 중국남경 심양을 거쳐 두달만에 장개석 국민당의 근거지인 서안에 도착, 이범석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 2지대(지대)에 배속됐다.

홍씨는 3개월여의 군사훈련을 받고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넘나들면서 공작대생활을 하게되는데 일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거나 광복군을 모집하는 것이 홍씨의 임무였다.

일본군 첩자이던 동포에게 광복군입대를 권유했다가 밀고를 당해 체포될뻔도했고 밀정이 너무 많아 죽을 고비가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것.홍씨는 2년여의 공작대활동을 끝내고 서안으로 귀대하다 일본군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중국군에 체포돼 6개월간 땅굴감옥소생활을 했다.땅굴에 갖혀 온갖 고초를 겪던 홍씨는 당시 러시아 공산학교 교장을 지냈던 이충모씨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홍씨와 같은 방을 쓰던 이씨는 장개석총통의 소련유학시절 스승이었는데 장총통에게 광복군임을 알리는구명편지를 써 홍씨가 석방된 것이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군 장교대우를 받아 국민당측으로부터 월급이 지급됐지만 대원들은 최소비용만남기고 독립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오로지 광복만이이들 삶의 전부였다.

1945년초 대원들은 미군교관으로 부터 6개월과정의 낙하.파괴.정보 등 특수훈련을 3개월만에 끝내고 한국에 파견될 날 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6일 비행기로 광복군 44명과 함께 서울에 도착하나 항복선언이 말단까지 미치지 않은 탓에 일군의 완강한 저항에밀려 하룻밤을 잔뒤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홍씨는 해를 넘긴 이듬해 1946년 5월 상해에서 배편으로 돌아와 수원에 있던 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중앙훈련소에서 일하게 됐으나 정부수립과 동시에 이단체가 해체되면서 한국군 특수부대 장교로 특채됐다.홍씨의 부하가 부정을저지르는 바람에 불명예제대하고 고향으로 가 공직에 몸담았다. 홍씨는 한때 보람을 느꼈던 공직생활도 5.16쿠데타가 일어나자물러나 야인생활로 들어섰다.

독립유공자대우를 쉽게 받을 수 있었지만 일제 앞잡이가 독립운동가를 자처하고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는 현실에 실망,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부산 대구 등지를 떠돌며 세상을 등졌다.

지난 90년 12월 때늦게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홍씨는 노기띤 얼굴로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독립유공자를 우대하고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일제앞잡이를 가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진정한 독립은 지금부터다. 남북통일을 이루고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며 나라걱정을 했다.사글셋방을 전전하다 지난해 겨우 당국의 배려로 영구임대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튼 홍씨에게 이따금씩 꺼내보는 훈장은 광복후에도 계속되는 역사의 질곡과 삶의 아픔이다. 〈이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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