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항일투사 후예-왕산 허위선생 손자 경성씨

"왜놈들은 정치·군사적으로 더욱 강성해지기만 하는데도 요즘 세대는 선열들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 큰일입니다"항일 의병장의 후손인허경성씨(69·대구시 북구 산격3동)는 광복 50년을맞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허씨의 조부는한말 대표적 의병장인 왕산(왕산) 허위(허위)선생(1855~1908).

경북 구미시 구미면 임은리(임은리)에서 출생한 허위선생은 십삼도창의대진소의 군사장이 돼 1908년 1월15일 서울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하는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일본군에 잡혀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이등박문이오,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하면서 순국하기까지 선비의 기개와의연함을 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이 풍비박산 됐지요. 의병장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제는 온갖 탄압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많은 가족들이 만주로떠났어요"

시련에도 오히려 임은(임은) 허(허)씨들은 왕산선생의 항일정신을 이어받아 더욱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허위선생의 장형인 방산(방산) 허훈(허훈)선생은 소유토지 3천여두락을 팔아아우인성산(성산) 허노(허노)선생과 허위선생의 의병활동에 군자금으로 보탰다. 또 청송에서는 의병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방산선생의 손자인 허종(종)은 독립단체인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다. 증손자가 대구시장을 지낸 허흡(허흡)씨다.

허위선생의 중형(중형)인 허노선생은 만주로 망명,이름을 혁(혁)으로 바꾸고 서간도에서 결성된항일단체 부민단(부민단:서로군정서의 모체) 초대단장에 취임했다. 이후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90세이던1940년 북만주 주하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허위선생과 종반간인 범산(범산) 허형(허형)선생은 을사오적 자살사건에가담했으며 범산선생의 아들인 발(? )과 규(규)도만주와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또 허위선생의 장남인 학(학)은 항일단체인 독립의군부(독립의군부)에서활동하다 만주로 망명,일송 김동삼선생 등과 항일인재를 양성 중 일경에 잡혀 시베리아에서 목숨을 잃었다.

특히 허위선생의 종조카인 허형식(허형식:족보에는 극)은 항일연군 제3로군의 참모장겸 3군 군장이 돼 1940년부터 1년여동안 북만주에서 일본경찰등1천5백여명을 사로잡고 5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용장이었다.또 왕산선생의 손자인 허진(허진:웅배)은 김일성과 같이 항일운동을 하다 현재소련에 거주하고 있다.

허경성씨는 "만주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 살면서 할아버지의 항일정신을결코 잊지 않았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임은 허씨 집안의 항일운동사를쳬계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며 '국역왕산전서'를 움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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