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강확립 구실 숙청자 양산

KGB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무한정으로 다양했다.가끔 우리는 지극히 소모적인 업무를 해야 할때가 있었다. 바로 숙청을 위한 배신에 대한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할때다. 소연방 초기에 국가 기강을만들기 위해 이런 작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상당한 피해자가 양산된 것도 사실이다.

이와관련하여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일대기를 가진 사람(그를 세르게이 안또노비치라 부르겠다)에 대해 얘기하겠다. 그는 오랫동안 공장에서, 한번은행정부서 또 한번은 국가안전기구의 임무를 맡아 해외에서 근무하기도 했다.나는 그의 이야기 속기록중에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뭔가를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서술이 본질적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주인공 이야기를 1인칭 관점에서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꼬노또프 열차 수리공장의 수리공으로 일했으며 꼼소몰 당원이었다.어느날 모스크바 중앙위원회에서 나를 호출했다. 영문도 모른채 수도로 떠났다. 스따라야 광장의 꼼소몰 중앙위원회 건물에서 레닌그라드의 끼로프공장에서 역시 나처럼 호출돼 온 보랴 루브치끄를 만났다.

그 당시 전 소련연방 레닌 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의 우선권에 따라 5%의꼼소몰당원(공산당원)이 모스크바 대외무역대학에 입학할수 있었다. 보랴와나는 바로 이 5%에 포함됐다.

보랴와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부서인 대외무역부 환율재무국에 발령 받았다. 나는 평사원으로 보랴는 과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후 그는 부국장으로 승진했고 나는 그의 추천에 따라 그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우리의우정은 더욱 돈독해졌고 서로 친한 사이인 여자들과 결혼까지 해 축제일이나휴가도 함께 보냈다. 1938년 새해도 우리집에서 함께 보냈다.이해 새해파티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보랴와 그의 아내 류브츠카, 나와아내 올랴, 우리 국의 비서인 슈쁘낀등 여러명이 참석했다. 슈쁘낀은 머리좋고 대단한 전문가였지만 사소한 일로 생트집을 잡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욕주기를 좋아해 우리 국에서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파티의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보랴의 전임자로 있다 체포된 까르쩨프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와 보랴의 언쟁이 시작됐다. 그는 적이 잔인하고음흉하다고 주장했다. 적은 우리의 당이었다.

우리 인민위원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슨 이유로 체포됐으며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결코 묻지 않았다. 긴급당 집회때 당위원회 비서가 "그가어떻게 해서 인민의 적임이 밝혀졌고 그래서 체포됐다"고 발표하면 그만이다.

보랴도 체포됐다. 나와 가진 논쟁이 문제가 됐음이 분명했다. 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제때에 배신자를 적발하지 못했음을 자인하고 즉시 행동에 옮길것을 촉구했다. 나의 차례가 됐다.

나는 그를 옹호하기는 커녕 "그렇소, 나는 그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했소"라고 말하곤 연단을 내려왔다. 보랴의 당 제명은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나도손을 든 것이다. 나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친구를 배신한 것이다.얼마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젊은 청년이 "놀라지 마시오. 우리 상관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오"라며 내무인민위원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나는 루비앙카(KGB본부)로 (끌려)갔다. 거대한 건물이 주위의 집들보다 우뚝 솟아 있었다. 한 면은 제르진스키(KGB창설자)광장을 향하고 있고 다른세면은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꽈배기 모양의 놋쇠 손잡이가 달린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 너머로 육군 중령이 싸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는 "궁금한게있소"라며 서류철을 꺼내 그중 한장을 내 앞에 내놓았다.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영국첩보기관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보랴의 진술서였다. 마지막 줄에는 매우 낯익은 글씨체로 '내 말은 허위가 없음'이라 적혀 있고 서명이 있었다.그가 배신의 칼을 빼든 것이다. 나는 나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야 했다. 휴가때 보드카를 마시며 나눴던 대화며 학창시절 얘기까지 모두 털어 놓았다. 러시아 망명자들이 반 소비에트 음모를 열렬히 모의하는 반 지하 선술집에 갔던 얘기도 했다.

끝이었다. 우리의 우정, 조국에 대한 열정, 신념, 자신의 역사, 모두 끝이었다.

보랴는 루비앙카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보랴와 다른 길을 걸었던 세르게이 안또노비치도 그 후 절친한 친구로 부터 배신을 당했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변화시킬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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