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태권도-향토채육의 脈

"김정훈 55년 경북 '지도관'열어"

태권도 지도관의 역사는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도관 창립자 전상섭 선생(납북)이 일본동양척식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유도전문도장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유단자들을 상대로 가라데 를 가르친 것이 그 효시다.

조선연무관 태권도부는 해방 이듬해인 46년 정식발족했다. 1기 수련생으로 전일섭(73.초대 전북태권도협회장) 이종우씨(73.현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등을 꼽을 수 있다.

창무관을 설립한 윤병인 선생도 일본에서 귀국, 조선연무관 태권도부 사범으로 활약하기도 했다.1년후 윤선생은 YMCA사범으로 자리를 옮기고 창무관을 만들었다.

지도관 의 명칭은 50년 제1대 중앙관장 윤쾌병씨(75.한국야쿠르트사장)가 부산에서 처음 사용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간 윤쾌병 관장은 이종우 부총재와 함께 태권도장을 차리고 지도관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53년 전쟁이 끝나자 지도관은 서울 중구 초등 한국체육관을 본거지로 지부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지도관의 발판을 마련한 윤쾌병 관장은 그러나 67년 태권도계를 떠났다. 무덕관 창시자 황기 선생과 함께 대한태권도협회 가입을 끝까지 반대하다 대세의 흐름 에 밀려 본의 아니게 정든 무도계를 뒤로 한 것이다.

윤관장의 반대 이유 역시 황기 선생과 마찬가지로 무도 태권도는 스포츠가 될 수 없다는 것 이었다. 태권도인이 무도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어느누구보다 걱정했다.

대구.경북지역 지도관의 첫뿌리를 내린 김정훈 관장(63.사업)은 스승 윤쾌병 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이어받아 무도정신에 투철했다. 부드러우면서 강한 사람, 성실한 학구파 등의 수식어는 김관장에게 늘 붙어다녔다.

서울 태생의 김관장은 6.25 전쟁을 계기로 대구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대구에 주둔해 있던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면서 동료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김관장은 군복무를 마친 뒤에도 서울로 되돌아가지 않고 55년 대구수창초등학교 강당에서 지도관경북본관을 설립, 대구사람이 됐다.

무도정신 을 숭상했던 지도관은 형(품세) 보다는 겨루기 를 중시했다. 무도인의 겨루기에서 핵심단어는 일격필살 이다. 상대방이 KO 되거나 완전히 항복할때까지 겨루기는 계속됐다.사실 무도 에서 경기 나 시합 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격필살 을 모토로 하는 무도에서 시합은 곧 일방의 죽음이나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쾌병 선생이나 황기 선생이 대한태권도협회 가입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태권도의 스포츠화 에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포츠화된 현대태권도의 각종 기술이 스피드 를 위주로 한 것이라면 초창기 무도태권도는 힘이 중요시됐다. 수련방법도 백(권투선수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을 치면서 팔과 다리에 힘을기르고 통나무에 새끼줄을 감은 단련대 를 이용, 주먹 과 수도(손날) 를 강하게 만들었다.상대방에게 아무리 많은 주먹과 발길질을 허용하더라도 한방 에 끝내면 그것이 곧 승리였다. 이것이 무도다.

초창기 지도관은 윤쾌병 관장의 반대로 대한태권도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각종대회에 참가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도관 수련생이 시합 을 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도관 중앙본관이 주최하는 전국 공수도 대회 가 있었다. 전국 시.도 대표들이 참가하는 이 대회는 상대방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허용됐다. 점수 를 계산하는 현재의 태권도경기와는 전혀달랐다.

출전선수들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도 색달랐다. 참가선수들은 검도시합때 쓰는 호구복으로 얼굴과몸을 보호했다. 시합은 거의 난투극에 가까웠다. KO만이 승리를 확인할수 있었다.김정훈 관장이 지도하는 경북본관은 60년초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다. 서종수(55.현 대구태권도협회부회장) 김태진(56.사업) 백운도(56.사업) 박보식(53.사업) 김정림(53.사업) 임의제(56.전 대구태권도협회부회장) 등이 이 당시 활약하던 핵심멤버들이다.

김정훈 관장은 최면술.칼 던지기.뼈치료 뿐만아니라 일어.중국어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 원래학구적인 성격의 김관장은 무도와 관련된 책을 모조리 구해 독파했고 일어.중국어 습득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이뤄졌다.

칼 던지기 에 얽힌 웃지못할 일화가 있다. 대구시 중구 대신동 시민극장 뒤편에 지도관 경북본관이 있을 때였다. 이 당시는 흙벽돌로 벽을 쌓았다.

수련생들은 벽쪽에 표지판을 붙여놓고 비도(칼던지기) 연습을 했다. 연습이 반복될수록 벽은 파이고 엷어져 갔다. 급기야 칼이 벽을 뚫고 반대쪽으로 튀어 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반대편은 양장점. 아가씨들의 비명소리가 태권도장으로 울려퍼졌다. 숨막히는 긴장이 감돌았다.다행히 칼은 몸에서 비켜가 양장점 탁자위에 꽂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다음부터 칼 던지기 연습에 상당한 주의가 따랐음은 물론이다.

김정훈 관장의 전성기는 자신이 지도한 제자가 66년 향토(대구.경북) 최초로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때이다. 이때 경북(대구)은 금.은.동 각 1개씩 3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석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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