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본.경영분리 실현 의의

대구은행은 67년 9월19일 현금출자 1억2천6백만원, 현물출자 2천4백만원(대구시중구남일동 구본점부지)등 총1억5천만원의 자본금이 완납돼 1주일뒤인 9월26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창립총회에는 전체주주 1백24명중 88명(소유주식수로는 96.8%%)이 참석했다.

발기인단이 위임받은 임원선임에서는 대표이사(은행장) 김준성, 전무 남옥현(전한국은행 증권부장), 상무 김현기(전한국은행 검사1국 은행검사역), 이사 오일룡(발기인), 김문석(발기인), 감사 권승호(전농협경북도지부 차장)등이 선임됐다. 또 명예회장에는 발기인대표인 여상원(대구상의초대회장)이 추대됐다.

대구은행은 해방이후 순수 민간자본에 의한 최초의 지방은행이라는 점과 당시 기업풍토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얻고있다.

또 주주구성도 1백주이하가 전체의 31.5%%인 39명, 1천주이하 소유는 전체의 75.9%%인 94명으로 지역에 주식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직원은 설립준비위원회 구성 하루뒤인 67년1월24일 공개채용시험을 통해 강신호(현건영산업법정관리인), 김옥배(전검사부장), 노균(현상무)등을 채용했다.

이와함께 설립준비중이던 6월11일에는 국내 금융기관중 최초로 여직원 공개채용시험을 실시했다.6명모집에 무려 3백9명이 응시, 51.5대1의 경쟁률을 통과한 이들 여직원들은 한일은행 대구서지점, 상업은행 대구지점등에서 위탁연수를 받았다.

또 당시 농협중앙회 경북도지부 지도과장이던 최호영(전감사)과 상업은행울산지점 책임자로 있던원호출(현대구종합금융회장)을 스카우트해 간부직원으로 채용했다. 8월21일에는 은행실무경력이있는 남자직원 15명과 여자직원 10명을 추가로 채용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구은행은 10월7일 총무부, 영업부등 2개부서 43명의 임직원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오전8시 축제분위기의 개점식에는 지역 각급기관장들이 대거 참석, 성황을 이뤘으며 이어 있은첫영업에서는 고박정희대통령이 첫고객으로 개점축하 정기예금에 가입했다. 첫날 영업에는 고객이 장사진을 이뤄 밤12시경에야 예금계수 집계가 완료됐다.

또 이날 예금고는 3억1천1백만원으로 당시 대구시내 일반은행 예금고의 7%%를 차지했다. 첫날대출금도 9천만원에 이르렀다.

한편 구본흥등 발기인 5명이 대지를 구입해 현물로 출자한 총1백5평의 대구시중구남일동 본점부지는 매입과정에서 지주가 비싼 가격을 요구할 것을 우려, 매입계약 임무를 맡았던 직원 강신호를 재일교포로 소개하기도 했으며 매입후에는 부지내에 있던 남미로식당등 7개점포의 세입자를설득해 내보내는 과정에서도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일제하에서도 오늘에 못지않은 지방은행 조직이 있었으나 20~40년대 합병과정에서 모두전국은행으로 전환됐으며 해방후 59년 서울은행이 최초의 지방은행으로 설립됐으나 곧 전국은행으로 발족해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대구은행을 시발로한 10개의 현재 지방은행 체제는제3의 지방은행시대로 분류할수있다.

〈池國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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