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왜곡·오류… 나뒹구는 유산들" 수천년 세월의 무거운 더께가 내려덮은 불국토. 부지불식간 소중한 유물유적은 묻히고 흩어져 이제 흔적조차 아득하다. 영겁 시간의 휘돌이에 스스로 그 그림자마저 깊숙이 숨겨버린 이 땅 남산은 더 이상 꿈결에서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망각의 땅, 그 모습의 한 자락이라도 더듬어 보기 위해 남산을 찾아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일제의 더러운 손길이 귀하디 귀한 유산을 훑어 그 빛을 잃었고 해방후 우리의 발길은 신중하지도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대한 대규모 지표조사를 통해 경주 남산의 불적 이라는 보고서를 낸후 남산은 또 반세기동안 긴 침묵속에 잠겼다. 허점투성이인 일제의 조사보고서는많은 절터를 뒤바꾸었고 여기저기 나뒹굴던 탑재와 불상들은 제 이름을 찾지못한채 수난을 거듭했다. 조선시대부터 잘못 알려져왔거나 일본인들이 학술적인 연구조사없이 멋대로 지은 일제(日製) 이름으로 불국토 남산의 신비는 더욱 가려진채 세월속에 묻혔다.
그나마 돌조각하나, 와편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인 몇몇 향토사학자들과 신라문화동인회등 민간단체의 외로운 손길에 남산의 명맥은 유지돼왔다. 이제까지 우리손에 의한 남산 발굴조사는 72년부터 시작된 문화재관리국의 경주지구 유적정비사업과 79년 향토사학자 윤경렬씨의 지표조사, 83년당시 문공부의 석탑실측조사와 86년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의 학술조사, 90년대 경주박물관 동국대의 남산유적 발굴조사가 전부. 그것도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조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필요에 따라 단편적으로 실시한 지표조사 수준에 그쳐 남산은 여전히 미답의 땅으로 남아 있다.서남산 장창골 금광사(金光寺)터는 일제의 섣부른 지표조사가 저지른 오류의 대표적 사례다. 금광사는 통일신라초기 선덕왕때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한 신인종(神印宗)파 교조인 명랑법사가 자기집을 절로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금으로 탑과 불상들을 장식해 그 빛이 눈부시게 찬란했던 이 절은 오랫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일제는 경주 남산의 불적 에서 식혜골 사제사터를금광사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금광평(坪), 금광제(堤)로 불리는 들판과 못이 절 부근에 있다는이유 때문이었다.
1966년 금광제를 논으로 만들기 위해 못물을 뽑았더니 못바닥에서 천년 세월에 묻혀있던 큰 절터가 나타났다. 장창골 금광사지. 일제가 주장한 사제사지는 사제사의 기와명문이 발견된 이웃 식혜골의 절터로 판명났다. 곱게 다듬은 주춧돌이 줄지어 있었고 연화대석과 계단석재, 불상파편, 경석편등이 수없이 발견됐다. 역사의 뒤안에 묻혀있다 빛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수많은 남산 유적의하나다. 지금은 3천여평의 밭으로 변해 갓 자란 배추가 스프링클러 물줄기를 받고 있는 이 터는발견당시 가람배치등이 면밀히 조사되지 못한채 또 다시 땅속에 묻혀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역사의 왜곡과 오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출지, 삼화령, 불무사지등 수많은 남산의 유적유물이 정확한 고증없이 일제가 멋대로 붙인 이름으로 제 모습을 찾지못한채 신음하고 있다.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기초되지 못한 잘못된 역사찾기의 결과다. 문수사, 구성대, 포비암은 어디인가!절터와 석탑, 불상, 비석대등 이제까지 알려진 3백30점의 유물유적외에 찾지 못한 남산의 유산은얼마나 되는지 현재로서는 도무지 알길이 없다.
주궁(珠宮)과 패궐(貝闕),그리고 황금전(黃金殿)이 가득한 불국 영산(靈山) 남산. 그 찬란한 문명은이같은 훼손과 무관심속에 버려져 덧없는 세월만 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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