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유럽대륙 지배 야심이 초라하게 망가지는 과정을 그린 전쟁실화 영화가'워털루'이다.
지난 70년 이탈리아가 당시 소련과 합작으로 만든 '워털루'(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전쟁영화의 서사시적 작품인 '전쟁과 평화'에 버금가는 역작으로 주목받았다.
유럽의 역사를 바꾼 이 치열했던 전투의 두 주역인 나폴레옹역은 로드스타이거가,웰링턴장군역은 크리스토퍼 플럼머가 각각 맡았다.
1814년 연합군의 파리 포위에 직면한 프랑스는 상원이 나폴레옹황제의 폐위를 결정하고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한뒤 파리로 귀환해 워털루에서 영국네덜란드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등 연합군과 사활을 건 마지막 결전을 벌이게된다.
나폴레옹군은 불타는 애국심에도 불구하고 워털루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을축으로 한 연합군에 대패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도 끝난다.
'워털루'는 웅장한 배경에 막대한 인원과 시설을 투입, 당시의 전쟁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워털루전쟁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약19㎞ 떨어진 워털루를 기점으로그 이래 남쪽 여러지역에서 펼쳐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워털루를 포함해 인근 브렌느-랄뤠, 제나프, 라슨느등의 마을을 배경으로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대결이 펼쳐졌으며 통상 이를 워털루 전투라 부른다.전쟁 당시 약 1만명의 전사자와 3만5천명의 부상자가 났다고 전해지고 있는 워털루일대는 현재 벨기에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변모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인구 2만8천명의 이곳은 각종 호텔과 유흥 및 오락시설이 들어서는 등 한적한 마을에서 역동적인 촌락으로 변모했다.
또 워털루란 지명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지구상의 50여개 도시및 마을이 워털루를본떠서 각종 이름을 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영화상으로는 라이벌인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의 명장 웰링턴의 맞대결이 더욱흥미를 끌었다.
실제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1769년 출생의 동년배이면서 각기 화려한 전투경력을 가진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워털루 전투는 개인적으로도 물러날 수 없는 한판의 대회전이었던 셈이다.
워털루 전쟁의 대표적 상징은 브렌느-랄뤠에 있는 '사자의 언덕(라 뷔트 뒤 리옹)'.전쟁 얼마 후 연합군의 승리를 기려 네덜란드정부가 1824년에서 1826년 사이에 만든 공식 전승 기념탑이다.
워털루 전쟁 현장의 평지에 45┾나 되는 삼각형 모양의 언덕을 쌓아 맨위에 큰 사자상을 만들어 놓았다.
사자상앞에는 당시의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전장 종합 배치도가 콘크리트판 위에 만들어져 있다.
이 상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프랑스군이, 뒤쪽에는 연합군이 진을 형성한 꼴을 만들고 있다.
사자상은 나폴레옹군으로부터 전쟁중 뺏은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반질이라는 조각가가 설계한 이 사자상은 단순히 철물 주조를 통해 한 아틀리에에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자의 언덕 바로 아래에는 원형 모양의 대형 파노라마관이 있어 전투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필름등을 통해 파노라마식으로 다시 보여 주고 있다.
파노라마관 맞은편 길건너 조그만 공간에는 나폴레옹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자신의 종말을 야기한 전투 현장을 지켜보는 형태로 서 있어 제국의 영광에 대한 말로를 다시 한번 곱씹게 한다.
나폴레옹이 지휘사령부로 썼던 제나프란 곳에 있는 까이유농장은 나폴레옹박물관으로 변모해 있다. 사자의 언덕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이다.
이 농장의 건물은 결전을 앞둔 나폴레옹이 작전회의를 열고 숙소로 이용했던 곳인데 워털루전투 직후 화재가 발생, 바깥 벽만 남기고 모두 타버렸다.
그러나 몇년 후 수리됐으며 1889년 현재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워털루에 있는 웰링턴 박물관은 18세기에 건립된 여러개 방을 갖춘 큰 건물로 영국장군들이 전쟁직전과 승리후 머물렀던 곳을 개조해 만들었다.
건물은 여러가지 변형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나라 공작의 거처였던 만큼 특성적인형태를 아직도 찾아 볼수 있다.
많은 그림과 데셍, 조각, 기록물 등이 그것이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부상한 독수리' 상이다.
워털루 전쟁의 마지막 대혈전을 기념해 전투 현장에 세워져 있다.
상 아래 돌에는 '1815년 6월18일 몽셍장에서 산화한 폴란드인 기병대의 장교및 하사관 그리고 장병에게 바침'이란 글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나폴레옹군은 이날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두시간동안 격렬한 저항으로 이곳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밖에 빅토르 위고 기념탑, 라벨 알리앙스 농장, 라 에 생트 농장, 라 파펠로트농장, 구몽농장 등 각종 전쟁관련물 및 유적이 20여개나 산재해 있어 워털루 전쟁의생생한 증거가 되고 있다.
워털루전쟁 도중 대포 및 총소리등이 내내 몰려 오고 있는 가운데 워털루에 인접한벨기에 브뤼셀은 연합군이 지고 나폴레옹군이 곧 쳐들어 올 것이란 흉흉한 소문으로 전 도시가 공포에 휩싸였다.
일부 귀족들은 머리카락까지 잘라 팔아가며 자금을 만들어 도피할 준비를 했다.그러나 18일 저녁 6시께 포로로 잡힌 일단의 나폴레옹군이 브뤼셀로 압승돼 오면서웰링턴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끌어 안으며기뻐했다.
〈워털루(벨기에).李東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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