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만수 나의 야구인생(16)-원년 코리안시리즈 4연패 침몰

원년 우승 후보는 단연 삼성이었다.

우리는 OB 박철순을 공략하지 못해 전기에는 3위에 머물렀으나 후기 우승을 따내며 무난히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했다.

1차전을 비긴뒤 2차전을 따내며 앞서갔으나 이후 내리 4연패를 당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더구나 6차전에서 이선희선배가 또 개막전과 같은 역전 만루포를 김유동에게 허용하면서 패해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83년 들어 삼성은 투타에서 아마 최고로 꼽히는 김시진과 장효조선배를 영입하면서 막강 면모를갖추고 다시 우승에 도전하게 됐다.

당시 29명의 선수중 국가대표나 대학·실업 선발 출신이 23명이나 돼 우리팀의 후보들이 다른팀에 간다면 모두 주전으로 기용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강의 멤버를 갖추고도 우리는 코칭스태프의 분열로 5할에도 못미치는 저조한 승률로 4위로 미끄러져 향토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코칭스태프 분열은 단장과 감독의 불화 때문이었다. 당시 단장이던 김모이사는 학생때 잠시 야구선수로도 활동했었는데 타순을 직접 짜고 수비 위치를 지시하는등 월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서감독을 못마땅해 한 김단장은 우승을 하지못한 책임을 묻는다며 재일교포 이충남씨를 조감독으로 영입했다. 단장의 지시를 받는 이조감독은 감독의 사인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선수들에게 사인을 내는등 사사건건 감독과 마찰을 보였다.

사공이 둘이니 배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5월말 서영무감독이 총감독으로 물러나고 이씨가 지휘권을 잡았으나 서감독에게 마음이 있는 선수들을 제대로 리드할 수 없었다.그런데 성적부진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어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파벌싸움을 낳고 말았다. 당시 주전중 대구상고 출신은 나를 비롯, 김시진, 장효조, 김한근, 오대석등 5명이나 됐는데 우리가팀을 주도하려다 경북고 출신과 대립돼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이후 우리들은 매스컴등의 상당한 비난을 받았지만 솔직히 말해 친소 차이는 있었어도 파벌 싸움은 결코 아니었다.〈정리·許政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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