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 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

-1920년 남녀 평등여부 "희대의 격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함이 옳습니까, 틀립니까?

불문가지인것을 왜 묻냐고 하겠지만, 1920년대의 지역 여성단체가 이런 주제를 들고 나와찬반토론을 벌이고 심판자까지 정해 판결을 유도했다.

통신망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파급효과는 미미했지만 가장 보수적인 도시 대구의 한복판에서 '남녀 동권'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열었던 열정들이 주종에서 동반으로 남녀관계를 변화시킨 원동력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1922년 2월13일,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여전도회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함이 옳으냐그릇되냐'를 주제로 택해 대구YWCA초대회장 임성례·지해리·상복향씨가 옳다고 찬성하는 편에, 차준이·이진교·조영수씨가 반대하는 편에 서 찬반격론을 벌였으며 신명여학교출신인 이선애가 심판을 맡았다.

대구여자기독청년회도 1922년 12월9일 남성정 예배당에서 여성지도자 손쾌례를 초청, '여자교육에 대하여'를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고, '대세의 변천과 우리의 각오'에 대해 박숙용(朴淑容)이 열변을 토했다.

대구야소교여자전도회는 전도강연단을 조직하여 1922년1월2일 의령군에서 '인생의 책임'이라는 연제로 이선애가, '가치있는 생활'이라는 연제로 이수은이 강연을 통해 여성들의 계몽에 주력했다.

20년대 경북도내 여성단체는 강연회나 토론회를 통해 여성삶의 질적 향상에 주력했는데, 각종 학원을 설립하여 인문·실기교육에도 힘썼다.

70년전 경북여성단체는 남녀 평등·명예와 재산·교육 같은 핫 이슈를 들고 나와 찬반 격론을 폈고, 제3의 심판자가 승패를 결정하는 획기적인 토론 방식을 선택, 자기주장훈련과 이견청취를 거친 이성적 합일점 수용과 같은 엘리트 여성운동의 전형을 잘 보여주었다.이처럼 20년대는 '일제 치하'라는 수난시기를 통해 집안에 갇혀있던 선각 여성들의 사회화욕구를 촉발시킨 시기였다.

24개 부(府)·군(郡)으로 돼있던 20년대 경북지방(현 대구 포함)의 여성운동은 양 갈래로 진행됐다. 여성단체활동과 비여성단체 활동이 그것이다.

경북지방에는 22개 여성운동단체(도표 ① 참조)가 있었는데 가장 왕성한 여성운동을 보여준대구부(大邱府) 7개, 김천군 4개 단체, 안동군 3개 단체, 영일군·영천군 각각 2개 단체, 군위군·청송군·경산군·상주군 각각 1개 여성단체가 어려운 여건을 뚫고 새 지평을 개척해나갔다.

달성군·의성군·영양군·영덕군·경주군·청도군·고령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문경군·영주군·봉화군·울릉도의 경우 1920년대에 여성단체가 활동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청년단체나 여성(또는 남성) 개인, 혹은 유지 여럿이 계몽프로그램을 펼친 사례(도표 ② 참조)는 많다.

20년대 경북지방 여성단체는 사회주의적 여성단체가 선보이는 26년과 근우회(槿友會) 지부가 대거 창설되는 28년에 가장 많이 창립(도표 ③ 참조)됐다.

경북지방 여성운동단체의 성격(도표 ④ 참조)은 종교단체가 8개로 개화이후 종교단체가 여성운동을 이끄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 다음을 교육단체·근우회·사회주의 단체가 따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단체는 종교단체이면서 교육활동에 주력했는가하면, 사회주의 단체이면서 계몽에 주력하는 혼합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20년대 경북지방의 여성단체운동은 기독교계통의 계몽주의적 여성운동단체가 가장 많아, 우리나라 전체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한다.종교 관련 여성단체는 교남기독교여자청년회·대구기독여자청년회·남산정야소교회여자전도회·남성정교회여전도회·흥해부인전도회·포항부인전도회·영천기독여자청년회·상주기독여자청년회등 8개 단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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