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윤기의 세상읽기-고마워요, 세리

내가 오래 머물렀고 앞으로도 오래 머물게 될 미국의 미시간 주립대학교 안에는 학생들과교수들을 위한 두개의 골프장이 있다. '그린피'라고 불리는 골프장 사용료는 10달러 내외로 아주 싸다. 학교에서 20분거리에는 꽤 유명한 '월넛(호도나무) 골프코스'가 있다. 지난초여름 박세리가 맥도널드 LPGA 골프대회에서 우승하고 곧바로 달려간 골프코스가 바로이 '월넛'이다.

치자고 하자면 굳이 못 칠 것도 없기는 하지만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시간이 좀 아까워서 힘써 배우지 않았던 것 뿐이다. 하지만 골프 치는사람들 욕은 하지 않는다. 내가 치지 않을 뿐, 치는 사람들 자유의사는 대체로 존중하는 주의다. 골프에 관한 한, 나는 칠 형편이 되는 사람은 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캐나다 리자이너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한국인 오강남박사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는골프 예찬론이 실려 있다. 나는 골프 치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종교학자 오박사의 골프예찬은 좋아한다. 여기 한 대목을 골라 소개한다.

…골프의 기본 요건은 과도한 힘이나 완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힘을 많이 줬다고 공이 멀리 나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편안한 자세로, 전체적으로 리듬과 타이밍에 맞도록 유연하게, 다시 말해서 자연과 합일되는 무아의 경지에서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피는 이런 경지를 내면적인 힘으로 치는 것, '참된 중력'을 체득하고 거기에 맞춰서 치는것이라고 했습니다. 헤리겔은 진정한 활쏘기에서는 활을 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것'이 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활과 활쏘는 사람과 과녁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쏘아야 진정한 활쏘기이기 때문입니다.…무엇을 하든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잊어 버리고, 무아가 된상태에서 나의 참 근원, 진정한 나와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스런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모두 그대로 도를 닦는 일입니다. 수도입니다. 경건한 예배입니다.…나는일요일 새벽에 골프 치러 나갈 때는 '신을 찾으러, 도를 닦으러 가는 심정으로, 종교의식에참여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나갑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도가 들어와서 자기를 움직여 나가도록 하는 경지를 터득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대목아니겠습니까.…

화요일 새벽, 장장 다섯시간이나 계속되는 US여자오픈골프대회 연장전 중계를 아침까지 보고 이 글을 쓴다. 박세리는 결국 승리했지만 그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자 밤을 하얗게 밝혔던 것은 아니다. 나는 패배하는 것도 두눈 부릅뜨고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박세리가 이겼든졌든 나는 이 글을 썼을 것이다.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박세리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었다.무엇이 그를 아름답게 만드는가?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겠지만 박세리는 위대하다. 왜 위대한가? 그는 초반에 타일랜드 계 미국인 라이벌에게 4타(打)나 뒤지는 상황에서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침착하게 경기를 끌어가면서 한 타씩 만회해나갔는데 내 눈에는 어린 그의 그런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보일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승리를 확정짓는 순간이 아니라 연장전마지막 홀을 앞두고 구두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공을 밖으로 쳐내는 순간이었다. 그는경기에서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자기와 싸움에서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그는 태연하게 물에 들어가 바깥의 페어웨이로 공을 쳐내고는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미국인 라이벌은 좋은 공을 칠때마다 웃었지만 박세리는 실수할 때마다 웃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노인과 바다'에나오는 산디아고 노인은 그러지 않던가? 인간을 죽을 수 있을지언정 패배를 자인하게는 되어 있지 않다고.

박세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승리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와 힘이었다. 세리에게는 있었지만 축구선수들에게는 없었던 것, 그것은 역경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믿음이었다. 오늘 아침에 그걸 가르쳐준 딸 같은 세리, 고마워요, 세리. 〈소설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