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1919년.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서일까. 이해 10월 27일 최초의 한국영화가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의리적 구투(仇鬪)'(원제 '의리적 구토(仇討)').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 김도산(金陶山·1891~1922)이 만든 28막3장의 연쇄활동사진극(연쇄극)이었다. 영화의 날이 10월 27일로 정해진 것도 바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키노드라마'로도 불리는 연쇄극은 이른바 연극과 영화의 합성물. 연극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산, 바다 등지에서의 장면을 필름으로 미리 찍어 연극 공연도중 불을 끄고 스크린에상영하는 것이다. 배우는 스크린속 움직이는 모습에 맞춰 실제 육성으로 대사를 한다.'의리적 구투'는 권선징악적인 반(半)활극조의 신파극. 작고한 부친의 유산을 탐내는 계모를전실 아들이 응징하는 내용.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자이자 흥행가로 당시 단성사주였던 박승필(朴承弼·1875~1932)이 5천원의 거액을 투자, 김도산이 직접 대본을 쓰고 한강철교, 노량진 등지에서 촬영했다.
1918년 대구 최초의 극단 '신극좌'를 만드는 등 초창기 한국 연극계에 공헌도가 높은 김도산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전실 아들역을 맡아 활극장면을 열연했다. '신극좌' 단원으로 무대에서 처음으로 기모노를 입고 일본 여성역을 연기한 것으로 유명한 남자배우 김영덕은 이영화에서 여장 계모역으로 출연, 눈길을 끌었다. 한국인이 만든 첫 영화였으나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미야카와(宮川)가 맡았다.
'의리적 구투'는 예술성없이 외국의 연쇄극을 모방한 작품에 불과했으나 관객들은 이 신기한 구경거리에 감동,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입장료도평소보다 올라 당시 설렁탕 한그릇값(10전)의 4~15배나 비쌌으나 흥행은 대성공을 거뒀다.입장료는 4등급으로 나뉘어 특등석 1원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다.10월 27일 '의리적 구투'와 함께 상영된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영화 '경성전시(京城全市)의경(景)'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역시 박승필 김도산 합작으로 서울의 장안을 실사 기록한영화다.
연쇄극의 대인기속에 1920년 김도산과 함께 연극계를 이끌던 '문예단'의 이기세(李基世)는애정과 질투를 주제로 한 통속신파극 '지기(知己)'를 연쇄극으로 만들었다. 주목할 것은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1897~1978)가 촬영을 맡아 우리 영화기술 발전에 큰공적을 남겼다는 점.
애석하게도 초창기 한국영화는 당시 유행했던 신파극단들이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제물'로 이용됐다. 1923년 한국 최초의 무성영화 '월하(月下)의 맹세'를 만든 윤백남 감독은 당시연쇄극을 "순수한 극의 발전에 독(毒)함이요, 배우 자신의 진지한 예술적 양심을 마비케"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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