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9매일신춘문예 동화 당선작-산할아버지의 한숨

이른 아침부터 미루의 창에 햇살이 가득 내려와 있습니다. 햇살의 간지럼 때문에 잠이 깬 미루는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빠는 변함없이 일찍 일어나셔서 신문을 보고 계십니다. 후다닥옷을 갈아입은 미루는 아빠의 손을 잡고 앞산에 갑니다. 아빠의 손에는 우리 식구들이 먹을 약수를 싣고 올 흰 물통이 들려있습니다.

오늘도 나무와 풀들은 상큼한 향기로 미루와 아빠를 맞습니다. 새벽녘에 소나기를 맞은 나뭇잎들은 방금 머리를 감은 것처럼 시원해 보입니다.

"미루야,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럽다. 조심해라!"

"미끌미끌하니까 더 재미있어요!"

"넘어지면 옷 버려요"

미루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끝을 보며 걸었습니다.

'어, 지렁이가 있네'

비가 와서인지 곳곳에 지렁이가 누워 있습니다.

약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빠와 미루는 이내 그 줄의 꼬리에가서 닿았습니다. 미루는 아빠 옆에 서서 '또 지렁이가 없나?'하고 발끝을 살핍니다.그때였습니다.

"아니, 왜 새치기를 하는 거에요?"

아빠의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그 앞의 아저씨에게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는 약간 멋쩍어하며말했습니다.

"저 아까 왔어요. 잠깐 저 위에 갔다가 온 거라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여기에 온 순서대로 줄을 서는 거지, 아까 온게 무슨 소용이에요?""아줌마도 참, 저 아까 와서 저 대신 물통을 세워 놓고 잠깐 운동하고 왔다고요. 여기 제 물통 있잖아요"

약수터에 있던 사람들은 아줌마 아저씨의 말다툼을 열심히 구경합니다.

바로 그때 미루의 발밑으로 무척 길고 퉁퉁한 지렁이가 지나갔습니다. 미루는 싸움을 구경하는아빠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지렁이를 따라갑니다.

지렁이는 약수터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땅속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미루는 "에이"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지렁이가 들어간 땅을 발끝으로 건드려 봅니다.그때 어디선가 "휴우!"하는 길고 큰 한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미루는 목덜미에 작은 바람을 느꼈습니다. 미루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쭉 뻗은 나무들 뿐입니다.

'한숨 소리가 분명히 났는데…'

약간 겁이 난 미루는 아빠가 계신 곳으로 가려고 얼른 걸음을 뗐습니다. 그때 다시 한번 "휴우!"하고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미루의 머릿속에는 무서운 괴물과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떠올랐습니다.

후들후들 떨고 있는 미루 앞에 나뭇잎이 툭 떨어집니다. 마치 한숨을 쉰 주인공이 미루에게 보낸엽서 같습니다. 미루는 다시 천천히 뒤를 돌아봅니다.

"으악!"

미루는 너무 놀라 몸에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합니다. 미루의 뒤에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할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머리부터 발까지 온통 초록색입니다. 심지어 턱에 난 텁수룩한수염까지.

"누, 누구세요?"

미루가 더듬거리며 묻자, 할아버지는 몸집 만큼이나 굵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난 이 산을 지키는 산신이다"

'산신?'

미루는 산신이라는 말에 갑자기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라고 시작되는 노래가 떠오릅니다.'산할아버지인가 보다'

노랫말이 생각나 무서움이 조금 가라앉은 미루는, 산할아버지의 초록색 수염과 초록색 얼굴을 신기한 듯 쳐다봅니다.

"내가 지렁이를 시켜서 널 이리로 오게 했다"

산할아버지는 다시 한숨을 한 번 쉬십니다. 그런데 한숨에서 초록색 연기같은게 나옵니다. 미루는초록색 연기가 나온 할아버지의 입을 열심히 쳐다봅니다.

"나에게는 너만한 아들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 애가 지렁이를 따라 땅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는구나. 타일러도 보고 화도 냈지만 소용이 없어. 자기는 땅 속이 좋다는 거야"그때, 저 쪽에서 미루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앗, 아빠다"

아빠는 다급한 목소리로 미루를 찾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저 내일 다시 올게요"

미루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갑니다.

미루는 아빠에게 산할아버지를 보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렁이를 쫓아가다가 숲속까지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왠지 아무도 미루의 얘기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미루는 그날 밤, 땅속으로 들어가 지렁이와 신나게 노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음날 미루는 눈을 뜨자마자 산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미루는 괜스레 마음이 바빠져서 서둘러 산으로 갔습니다.

약수터에는 긴 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미루는 아빠의 눈을 슬쩍 피해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아직 산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루는 어제 지렁이가 들어간 곳을 찾아보며 산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음…"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산할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산할아버지, 어제 하던 얘기를 계속해 주세요"

산할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산루, 산루는 내 아들 이름이다. 산루에게 도대체 땅속에서 뭘 하고 지내냐고 물었어.

산루는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지. '개미의 짐을 날라주기도 하고요, 두더지의 집에도 놀러가요. 나무뿌리들 틈에서 숨바꼭질하는 건 정말 재미있어요. 그리고 지렁이와 의형제를 맺었어요. 땅속의 친구들은 눈이 어두워서 그런지 친구를 사귈때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봐요. 제가 초록색 얼굴을 가졌다고 놀리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어요'

산루의 말을 듣고 난 놀랐어. 산루가 초록색 얼굴 때문에 놀림을 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땅위에 있을때 누가 널 놀렸느냐고 넌지시 물었지. 아니나 다를까, 산루는 얼굴이 초록색이라느니, 나뭇잎으로 된 너덜너덜한 옷을 입었다느니, 아버지가 왜 그렇게 나이가 많으냐고 하면서 놀림을 당했다고 털어놓더군"

미루는 갑자기 단짝인 경수가 생각나며 뜨끔해졌습니다. 미루는 경수의 시꺼먼 얼굴을 자주 놀려댔습니다. 경수가 일부러 시꺼먼 것도 아닌데 왜 그걸 가지고 놀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루는, 경수가 놀림을 당할때마다 시무룩해지는게 재미있어서 경수를 자꾸만 더 놀려댔습니다.경수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생각하니 미루는 처음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루는, 경수도 산루처럼 땅속으로 숨어버리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수는 미루의 단짝인데 말입니다.

산할아버지는 초록색 한숨을 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산루는 겉모습만 가지고 놀리는 친구들보다 따뜻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땅 속이 좋았던 거야. 나는 산루를 이해하지만, 이제 그 애가 땅속에서 나오기를 바란단다. 이곳에서나와 같이 살면서 산신이 되는 공부도 해야 하고…. 그리고 땅속에 있으면 그 애의 눈이 자꾸 나빠질 거야. 그것도 큰 걱정이다"

미루는 산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한숨을 쉬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산할아버지는 미루를 부드럽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 산루를 밖으로 불러 주렴. 너는 산루의 겉모습을 가지고 그 애를 놀리지는 않을 거지?"

미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경수도 놀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저, 어떻게 하면 되죠?"

"이 쪽으로 오너라"

산할아버지는 두서너 발자국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곳에 입을 가까이 대고 산루를 불러보렴"

산할아버지는 지팡이 끝으로 미루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셨습니다. 미루의 목소리는 산할아버지만큼 크고 굵어졌습니다.

미루는 땅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습니다.

"산루야, 산루야! 난 미루라고 해. 내 목소리 들리니?"

산루가 있는 땅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산할아버지는 지팡이로 땅을 몃 번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뭔가 꿈틀대는 것이 보였습니다.

미루는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산루야, 네가 땅 위로 나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야"

미루의 말이 끝나자 꿈틀대는 모양이 점점 커지더니 뭔가가 조금씩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미루도 산할아버지도 숨을 죽이고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초록색 머리가 보이고 얼굴과 팔이 나오더니 귀여운 아이가 땅 위에 올라섰습니다. 산할아버지는눈물을 글썽이며 산루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산루야!"

"아빠!"

산루는 산할아버지를 안고 울다가 멀뚱하게 서 있는 미루를 발견하였습니다. 산루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습니다.

"네가 미루니?"

"응"

"나랑 친구가 되겠다고 했지?"

"응, 나 매일 산에 올게. 우리 재미있게 놀자"

미루와 산루는 서로 쳐다보며 방긋 웃었습니다. 산할아버지의 초록색 웃음이 숲을 울리며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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