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거대도시 인접 시·군의 정체성 상실. 대도시에 '혼'을 뺏긴 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당하는 새, 그들 나름의 '줏대'는 사라졌다.
정체성의 소멸이란 주제를 들고 칠곡, 창녕을 더듬어온 취재팀의 관심은 자연 경산에 미쳤다. 대구의 위성도시란 별칭을 젊은 도시 경산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서였다.
경산의 '새 모습'을 찾아가는 길. 취재팀은 대구 남부정류장을 넘어 고산로 일대를 메운 경산행 차량행렬에서부터 경산의 '부활'을 감지할 수 있었다.
"위성도시요? 대구 사람들 말이지 우린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 오히려 대구가 경산의 위성도시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상대온천에서 만난 향토사연구가 예대원(62)씨의 어조는 사뭇 격앙돼 있었다. 과거의 '경산 대구편입설', 위성도시 운운은 일부 대도시 편향적 인사들이 지어낸 말일 뿐, 경산의 자존심만은 여전하다는 얘기. 대구 섬유공장들이 '탈(脫) 대구'를 외치며 경산으로 몰려든다고 했다. 해마다 유입인구가 늘어 경북도내에서 포항 다음으로 인구증가율이 높다는 사실을 예로 들며 경산이 머잖아 대구완 또다른 형태의 중심도시로 우뚝 설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경산은 조선조부터 하나의 현(縣)이었습니다. 고유의 역사와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는데 대구와 지리상 가깝단 이유로 위성도시라 단언하는 것은 무리죠"
경산이 어떤 곳인가. 일찍이 비옥한 곡창지대를 형성, 삼한시대 옛 압독국(押督國)의 터전이자 신라의 삼국통일 전초기지가 됐고 김유신 장군이 신라 화랑을 연무시킨 곳이 아니던가.
그뿐이랴. 삼성현(三聖賢)으로 추앙받는 원효대사, 설총, 일연선사가 출생한 유서깊은 곳. 덕분에 고유의 문화가 여지껏 보존되고 있는 몇 안되는 전통문화의 중심지다.
"경주가 유형문화재의 보고라면 경산은 정신문화의 산실입니다. 지금도 한장군을 자인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대제를 올리는 것도 정신적 지주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경산시민의 자부심 때문입니다"
경산의 '문화촌'은 자인. 면사무소에서 만난 박도식(79) 한장군놀이보존회장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한장군놀이는 신라말 또는 고려시대 인물로 전해지는 한장군 오누이가 꽃관을 쓰고 춤추며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유인, 섬멸했다는 전설을 놀이로 재연한 것. 180여명의 보존회 회원이 매년 단오때 중요무형문화재인 한장군놀이를 시연한다고 했다. 지난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노동요 '자인 계정들소리'도 함께 전승보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도 자랑했다.
경산시민 스스로 경산의 역사적 전통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던 현실과 문화욕구 충족을 위한 자생적 노력이 미약했던 것은 물론 '옥의 티'. 그러나 30여년을 경산문화원장으로 재직해온 이원희(63)씨는 "그동안 경산의 전시·공연문화가 미흡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의외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경산시가 8개년 계획으로 삼성현 현창사업을 추진하고 김유신장군 연무장 복원, 시립박물관 건립에 힘쓰는 등 가시적 성과가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씨의 대답.
취재도중 지나는 경산은 온통 못 천지였다. 경산 지도를 펴놓으면 지도가 파랗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 파란색은 젊음의 징표라고 했던가. 개방적인 도시라는 인상이 짙게 묻어났다.
경산의 개방성과 빠른 외부 적응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케이스가 농업분야. 지난 91년 '첨단농업의 메카'로 불리는 경산에서도 가장 먼저 수경재배를 시작한 김덕규(39)씨의 자인면 서부리 농장을 찾았다.
"경산만큼 과수농업의 품종전환 주기가 빠른 곳도 없을 겁니다. 경산에서 생산중단한 퇴출 작목을 경북 북부에서는 몇년뒤 새 작목으로 받아들일 정도니까요" 2천100평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도시의 백화점과 계약재배하고 있는 김씨는 "일찍부터 대도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수익 증대를 꾀하려 신기술 도입을 서두르다 보니 타 시·군 농민의 모범이 돼온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경산은 공업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춰가고 있었다. 부도율이 낮고 노사분규가 거의 없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는 섬유·기계·금속 중심의 진량공단. IMF 상황이건만 삼립산업 등 150여 입주업체에서 나는 작업 소음과 화물차의 분주한 왕래는 그대로였다.
"지난해 준공된 14만5천평 규모의 자인공단이 IMF영향으로 한때 공장용지 분양이 저조했으나 최근 입주가 50% 가량 완료되는 등 분양경기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경산 토박이 김종국(50) 경산시 새마을과장. 봄하늘만큼이나 맑은 표정으로 "자인공단 입주가 모두 끝나면 경산시내 크고 작은 기업체 수가 2천개에 육박할 것"이라 전망했다.
경산의 '홀로서기'는 취약분야인 초등교육 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란과 6·25때조차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경산이 매년 수백명씩의 초등학생을 위장편입 등의 편법으로 대구에 빼앗기며 분루를 삼켜야 했던 핸디캡이 중등교육의 공동화현상.
60년대 후반 전교생이 2천명에 달했던 자인초교의 현재 학생수가 고작 700여명. 10만여명의 교수·학생이 유동하는 11개 대학이 밀집한 세계적 학원도시로서는 더없는 수모인 셈.
그러나 최근 경산시가 기존의 경산중·고를 최신시설을 갖춘 경북도내 명문학교로 육성키 위해 계양동 이전을 추진중이며, 향토기업인 새한그룹도 2001년 명문사립교 개교를 목표로 전국 최고수준의 학습시스템을 갖춘 새한중·고 설립을 서두르고 있어 초등학생 외부유출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세기말. 거점·위성도시간 관계를 더이상 절대적 규모의 잣대로만 구분할 순 없는 시대. 경산은 광역시 대구의 평면 확산에 맞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정체성을 창출하며 분연히 떨쳐일어나고 있었다. 경산엔 이미 봄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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