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25)대구의 딴 얼굴 비산·남산동 달동네

70년대. 현대화와 개발의 구호속에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성서에서 시지까지. 대구를 포위하듯 둘러싼 고층 아파트 단지.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베란다에서 도시를 내려다 본다.

하지만 도시 한가운데 지붕 색깔부터 틀린 동네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달동네'라 부르는 곳이다.

대구시 서구 비산 2·3동 14, 15, 16통.

새로 뚫린 소방도로를 따라 늘어선 서구풍의 빌라들.

하지만 도로가 멈춰선 곳에 이어진 비탈진 골목길로 발을 옮기면 딴 세상이 펼쳐진다. 폭 1m가 채 될까말까한 골목길. 비라도 내리면 하수구가 따로 없다. 때론 화장실에서 역류한 분뇨가 냄새를 더한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우산 하나 마음껏 펼수 없는 길을 잘도 다닌다.

"예전에는 하수구가 바로 골목이야. 그래서 어떤 집은 아직도 안방 한벽이 옹벽이지". 해방전 전라도 광주에서 시집와 여기서 60년을 살았다는 이옥순(81) 할머니."그때도 성내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초가를 이루고 살았다"며 달동네의 유래를 전해 준다. 달성공원과 맞붙은 비산 2·3동에 도시 생활에서 뒤쳐진 빈민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6·25 전후. 아카시아 나무를 베내고 하나둘 들어선 판자집들이 60년대쯤 야산 하나를 덮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이뤘다. 그뒤론 변함이 없다. 단지 몇십 가구가 함께 쓰던공동 화장실과 수도가 사라졌을 뿐.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할 겁니다. 저도 아직 익숙지 못해요". 비산 2·3동 동사무소에서 영세민 업무를 담당하는 홍관표씨. 이곳에 온지 7개월이 됐다는 홍씨는 손바닥 같은 동네지만 낳선 길로는 절대 들어서지 않는다고 했다. "아차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도 미로 같이 골목길이 꼬여있어서 낯선 집을 찾아갈때는 몇번을 뺑뺑 돌아야 합니다".

비산 2·3동 달동네는 인동촌 시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또 이 시장을 중심으로 뭍어 있는 애환도 다르다.

시장 남편 산비탈에 자리잡은 200여채의 집들은 모두 무허가다. 시유지 위에 지어진 집들이기에 딱 하니 주인이 없다. 그래서 흙벽에 시멘트만 덧씌운 벽, 슬레이트 지붕위에 비닐 장판을 덮은 집들이 대다수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난한 세월을 버텨오고 있다.

하지만 인동촌 시장 북편 15통 지역은 개인 소유의 집들이다. 그만큼 개발에 대한 욕심도 불만도 많다.

15통에서 40년을 살아온 이길동(78) 할아버지의 설명. "일제 시대부터 도시계획에 도로가 나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요모양이야. 비산교회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동네가 완전히 망가졌지". 도로 개설을 위해 지반을 높이면서 동네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씨 할아버지는 "20년전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살아서 그꼴 보기는 틀린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랄까. 요즘 비산동 달동네에는 빈집이 계속 늘어간다. 원주민이 떠나간 자리를 채워 줄 이들이 없는 탓이다.

방 4칸짜리 집 한채 사글세가 1천만원 내외. 그래도 선뜻 여기에 들려고 하는 이들은 없다.

"돈 벌어서 떠나고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고 해서 옛날 사람은 이제 거의 없어요. 어쩌다 노부부들이 빈집에 이사오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도 흔치 않습니다".김옥분(69·여)씨는 "나는 정도 들고 해서 죽을때까진 이집에 살겠지만 오십만돼도 여기서는 못산다"며 달동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탈출'의 욕구를 내비쳤다.김씨 말대로 비산동 달동네에선 50대 이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엔 가출한 10대나 노숙자들이 빈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잦아 주민들의 불만을 더하게 한다.중구 남산 4동 까치 아파트 서편 지역도 비산동과 함께 대구에 마지막 남은 달동네중 하나. 재개발이 시작된 이후 규모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고단한 삶이 있다공동묘지와 화장터. 그리곤 아카시아 덤불이 전부이던 곳에 세워진 4평짜리 난민촌 판자집. 판자가 블록으로 양철이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삶은 비슷하다."52년 미군들이 피난민촌을 만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지. 나도 그때부터 살고 있고". 평안도 정주가 고향이라는 안공열(78)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생활을 빼면 평생을 남산4동에서만 살아왔다.

"60, 70년대 의성, 합천, 고령등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올 때는 방 3칸짜리 집에 10여명 이상씩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사는 냄새가 났지".안씨 할아버지는 폐가로 변한 집을 가르키며 '달동네'의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했다.

키보다 낮은 처마와 어른하나 제대로 지날 수 없는 골목. 여름엔 땀냄새, 인분 냄새가 진동하고 겨울엔 칼바람이 스며드는 벽. 도시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었고 아파트 사람의 베란다에선 지저분한 곳 달동네. 그렇지만 우리 현대사를 통틀어 몇안되는 '기회의 땅' 이었다. 피난민에게, 시골땅 팔고온 촌놈에겐 도시 한자락에 속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곳. 한세기의 자락을 뒤로한 채 이제 달동네는 점점 사라져 간다.

〈글:李宰協기자, 사진:鄭又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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