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 막사발 황금 3천근·성 한채와 맞바꿔

임진왜란, 정유재란. 오늘날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야키모노 센소(陶磁器 戰爭)'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 도자기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7년 전쟁 동안 왜장들은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에 이르는 도공을 납치해갔다. 그 결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반면 우리 도자기 산업은 쇠퇴를 거듭하여 명맥마저 희미한 위기를 맞게 됐다. 오늘날 우리 도자기 산업은 과거 영광만 곱씹으며 지금까지 뚜렷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최근들어 2001년 이천국제도자엑스포를 개최키로 하는 등 도자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 도자기 원형을 찾기 위해 일본 도자문화를 이끌어온 일본 현지의 '조선 피랍 도공 6대 가문'을 찾아 그들의 궤적 속에서 우리 도자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본다. -편집자

1590년 11월 7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교토 쥬라쿠다이(聚樂第)에서 조선통신사 황윤길 일행을 접견하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외교회담 도중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더니 어린 자식 쓰루마쓰(鶴松)를 안고 나와 얼렀다. 이 때 안고 있던 아이가 오줌을 싸 시녀가 달려나오자 도요토미는 아이를 건네주고 옷을 갈아 입었다 "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적고 있다.

도요토미는 24세에 본처 '내내'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16명의 소실이 있었는데 그 중 요도도노(淀殿)와의 사이에 첫 아들 쓰루마쓰가 그가 52세가 되던 1589년 5월에 태어났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이는 만 2세가 되던 1591년 8월 갑자기 죽는다.

비통함에 기가 막힌 도요토미는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린다. 비탄에 젖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도요토미가 하루는 누각에 올라 "사나이는 무력을 만리 밖에 써야 하는데 우울하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느냐"고 말하더니 돌아와서 바로 부하 영주들을 소집, 조선정벌을 발표한다.

그러나 출병명령을 내린 도요토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조선을 향해 조총을 겨누었지만 아직 국내 정국이 평온하지는 못한 형편이었다. 때문에 그는 조선으로 출병한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병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수송선을 곧바로 본국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했다.

도요토미는 이 때 빈배로 귀환할 경우 전복될 위험이 있으므로 배의 무게를 채우기 위해 "조선 세공인과 아녀자들을 잡아올 것"을 명한다. 여기서 세공인은 바로 도자기 기술자들이었다.

도요토미는 왜 하필이면 도공(陶工)을 잡아오라고 했을까.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본 도자기와 다도(茶道) 역사를 되짚어 볼 수밖에 없다.

16세기말, 자기(磁器)를 생산하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과 명(明)나라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조선 무역 독점권을 가진 쓰시마도(對馬島) 도주(島主) 소오 요시도시(宗義智)는 조선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는 당시 다이묘(大名, 막부 체제 아래서 번을 다스리는 영주)들이 전장에서도 다회(茶會)를 열 정도로 다도에 심취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만큼 다도정신이 결집된 차그릇에의 집착은 지위에 비례할 만큼 강했다.

다회 자리에는 응당 호랑이 가죽이 깔리고 중국의 청자잔이 최고 자리에 올랐다. 다도의 사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심해져 도요토미는 황금의 다실(茶室)을 만들고 서양 선교사들을 불러 다회를 열 정도로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귀족취향의 다도에 반발한 차의 대가들 사이에서는 서민의 차, 검소의 차, 즉 '와비 차'가 서서히 고개들기 시작한다.

일본 다도의 중흥조로 불리는 다케노조오(武野紹鷗)에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와비 차는 도요토미의 차선생을 한 센리큐(千利休)에 와서 완성을 이룬다. 와비 차가 널리 퍼져 나감에 따라 중국의 화려한 찻잔보다는 꾸미지 않은 서민의 그릇, 소박한 일용잡기가 차그릇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그 정신에 부합한 차그릇들이, 흙부뚜막에 마구 굴려도 조심스럽지 않은, 바로 그런 조선의 그릇들이었다.

조선의 대표적 그릇 중 하나, 키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가 있다. 지금은 일본 국보로 교토 다이토쿠지사(大德寺) 코호이안(孤蓬庵)이란 절에 보관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마치 '개밥 그릇 같이 생겨' 전혀 볼 품 없는 이 그릇이 이미 당시에 황금 3천근 값인 550만냥에 팔렸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지지리 못생긴 이 그릇은 나중에 성(城) 한 채와 맞바꾸어지기까지 했다니….

찻그릇을 중시하는 이런 기풍들은 오늘날까지 일본 다도계에 고스란히 전해내려져 다인들 사이에서는 좋은 그릇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다.

취재 기간중 다도선승의 다회 손님이 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일본 다도에서 차그릇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주인은 손님의 격에 맞춰 차그릇을 준비하고 차를 다마신 손님은 준비된 문종이로 깨끗이 닦은 후 그 그릇을 돌려보며 감상하는 것이다. 손님들은 그릇의 내력 설명은 말할 것도 없고 문양, 기법, 만든 사람에 대한 것까지 화제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찻그릇에 대한 이야기는 두시간 이상 계속 이어졌다.

찻그릇에의 심오한 의미 부여, 이것으로 말미암아 도요토미는 조선 도공을 잡아오도록 한 것이다. 또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오늘날 일본 도자기가 세계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본 도자기의 밑거름이 된 조선 피랍 도공 6대 가문을 덧트는 동안 우리는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돋을 새김하면서 일본 도예 현주소를 확인해 보려하는 것이다.-글·사진:전충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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