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이어트 꼭 해야할까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살을 뺄 수 있는가를 선전하는 광고문들이 하나둘이 아닌 것을 보면, 비만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이제 남의 나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이, 마른 체형의 사람이 미인으로 대접받는 요즘 다이어트 한번 해보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무리한 살빼기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기사가 신문지상과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급기야는 '깡마른 모델 쓰지 말라'라는 제목의 기사가 모일간지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내용을 보니 영국 의학협회가 깡마른 광고 패션 모델들을 미의 상징인 것처럼 우대하는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현실적 체형의 여성들을 모델로 채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고 한다. 오늘날의 인기 모델들의 체형을 정상이라고 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성들은 그와 같은 몸매를 따라가려고 과도한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건강을 헤치고 있다는 것이 협회의 주장이다. 이에 앞서 영국의 여성청장도 모델 협회 관계자들을 만나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을 등장시키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니, 다이어트가 문제이긴 문제인가 보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이렇게 마른 몸매를 미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았을까. 서양의 명화를 보면 지난 19세기까지만 해도 복스럽게 살찐 여인이 미인으로 자주 등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15세기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19세기 후반의 화가인 르노와르의 여인상만 보더라도 미와 풍만함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권에서도 달덩이 같이 둥글고 탐스러움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언제부터 깡마른 체형이 미의 기준이 되었는지는 정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미인의 기준이 바뀐 원인은 바로 사진술의 발달에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19세기 중엽 탈보트와 다게르에 의해 사진술이 세상에 소개된 이래, 풍만한 체형과 둥근 얼굴의 여인들은 이른바 '사진발'이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가 되기 시작했고, 그 대신 깡말라서 음영이 뚜렷한 사람들이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사진이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 20세기에 들어서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바뀌어, 그 오랜 전통을 지닌 미인의 기준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대세를 바꿀 수야 없을 것이다. 사진술의 영향 때문이든 또는 다른 이유 때문이든 이제 우리의 의식속에 깊숙이 자리잡게 된 아름다움의 새로운 기준을 어찌 파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짧은 역사를 지닌 이같은 기준이 절대적인 것인 양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데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기준에 맹종하느라고 정서적 장애와 육체적 질병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물론 생사까지도 건다고 하니, 이 새로운 기준의 횡포가 어찌 심하지 않다고 하리오.

물론 지나친 비만은 건강에 해롭다. 또한 식사 조절은 건강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주의의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렇게 건강을 해칠 정도로 비만한가? 필자는 상당기간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정말로 비만이란 무엇인가를 실감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비교하자면,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는 비만증 환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아니,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까지도 너무나 날씬하고 건강해 보인다.

그래서 묻는다. 과연 우리에게 다이어트가 그렇게 절체절명의 과제인가라고. 다이어트 때문에 소모하는 시간과 돈을 좀 더 유익한 곳에 쓸 수는 없을까. 가령 아직도 굶주리고 있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주변 바깥쪽의 사람들, 그늘 속의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면 어떨까? 또는 정신을 살찌게 하는 데, 정신을 위한 '역(逆)다이어트'를 하는 데 쓰는 것은 어떨는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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