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자, 국내의 신문들이 '리건'으로 통하던 그의 이름을 '레이건'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은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아일랜드계 이민의 후손인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리건'으로 잘못 부르던 관행을 고쳐 '현지'의 발음대로 '레이건'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정정 기사와 함께, 모든 신문에서 '리건'이라는 호칭은 갑자기 사라졌던 것이다.
얼마전 표면적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nosome)를 합성한 용어인 '게놈'(genome)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지난 5월 말 모 일간 신문을 통해 '게놈'의 발음은 잘못된 것으로 '지놈'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정정 기사를 통해 국내 언론에선 '게놈'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으나 이는 '일본 및 독일식 발음'이며 미국과 대다수 학자들은 '지놈'으로 발음한다는 이유를 들어, 현지 발음 원칙에 따라 앞으로 '게놈' 대신 '지놈'으로 표기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며칠 후 게놈이라는 용어의 발음은 '일본식'이기에 본지는 현지 발음 원칙에 따라 '게놈' 대신 '지놈'으로 표기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두 번째 정정 기사가 나오고 바로 며칠 후 '게놈'이 아닌 '지놈'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를 취재 일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미국 유학 시절 '게놈'으로 발음했다가 망신당한 일이 있었다는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과학자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언론사에 줄곧 '지놈'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바로 이와 같은 일련의 기사를 보며 필자는 무엇보다도 '게놈'이 '일본 및 독일식 발음'이라는 해명에서 '일본식 발음'이라는 해명으로 옮겨간 점과 '현지 발음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주장에 주목하게 되었다. 두 번째 해명 기사에서 '독일식'이라는 말이 빠진 것도 흥미로웠지만, '현지 발음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주장도 대단히 흥미로웠던 것이었다. '현지 발음 원칙'이라니? 이때의 현지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취재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신문이 뜻하는 '현지'란 바로 미국일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일련의 기사를 보며, '일본식'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에 기대려는 태도도 문제이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미국을 '현지'로 생각하려는 태도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표면상 '리건'을 '레이건'으로 부르기로 한 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전혀 다른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거론되었던 '현지'와 지금 이 신문이 말하는 '현지'는 같은 것일 수 없다는 뜻이다. '게놈'이 아니라 '지놈'이라는 주장 뒤에는 알게 모르게 모든 것을 미국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잠재 의식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모든 신문이 '게놈'이 아닌 '지놈'으로 표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 있던 어느 날, 6월 초 모 일간 신문에 나온 해설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정부.언론 외래어 공동 심의 위원회에서 이 용어는 1920년대 독일 식물학자 빙클러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이기에 독일식으로 '게놈'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영어 역시 '외국어'의 하나로 간주키로 했다고 하면서, 당사는 앞으로도 계속 '게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 기사를 보며 필자가 우려하는 마음을 덜었다고 한다면, 이는 좀 지나친 표현일까. 사실 일상 생활에서 시작하여 방송과 신문의 광고에 이르기까지 넘쳐나는 영어 또는 영어식 표현을 보면 우리의 의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영어 또는 미국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정신적 식민지화에 빠져드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을 덜어 주는 것이 바로 '게놈'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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