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5일 서울대 명예교수인 동양사학자 민두기(閔斗基)교수의 49제 추모모임에 참석했었다. 오랫동안의 투병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위에 전혀 알리지 않고 본인의 죽음조차도 주위에 연락치 못하게 한채 돌아가신 민교수의 서거를 아쉬워하는 동료와 선후배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추모모임이었다.
이 추모식에서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보고와 그가 이루지 못한 학문적 유업을 잇겠다는 후배와 제자들의 다짐이 있었지만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동학이요 선배인 고병익교수를 비롯한 여섯 사람의 민교수에 대한 '추모와 회고'였다. 학문적으로 스스로에 엄격했던 민교수는 학생들에게 추상같았으며,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엄격성이 우리나라의 동양사 연구수준을 오늘날의 단계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고 여러 사람들은 회고했다.
필자가 민두기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미국의 하버드-옌칭 연구소에서였다. 서울에서 막 학위를 마치고 박사후기 연구를 위해 방문학자로 그곳에 가 있던 필자는 그간의 학문적 업적을 영문으로 출판하기 위해 '협동연구자(Research Coordinator)'자격으로 온 민교수를 만났던 것이다. 귀국 후에도 민교수와의 사적인 만남은 지극히 한정되긴 했지만 논저의 교류를 통해 최근까지도 지적교류를 지속해 왔었다. 필자는 그가 보내준 논저를 부지런히 읽었고 그는 국내에서 이렇다할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필자의 연구를 심정적으로 엄호해 주었다. 필자는 필자의 글을 언제나 주의 깊게 읽을 민교수를 독자의 한사람으로 고정시켰으며, 바로 '이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스스로의 자세를 추스렸던 것이다.
민교수는 타고난 학자였으나 이러한 천분(天分)에 만족치 않고 스스로를 학문적으로 더욱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가 31세때 '사상계'지에 기고한 '한국학자론'(1963년 1월)은 당시의 학계일반에 대한 현황의 진술이었으나 거기에는 당대의 학계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독일의 역사학자 몸젠이 막스 베버에게 그의 창(槍)을 물려주는 학문적 권위의 전승이 이 나라에는 왜 없느냐를 온 몸으로 묻고 있는 글이다다양한 글재주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전공 이외의 분야를 결코 넘보지 않았고, 혹 신문 잡지에 글을 쓰더라도 전공과 거리가 있는 글을 쓰기를 기피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구를 위해 가급적이면 주변과의 교통을 스스로 차단하고 외적 유혹에도 결코 곁눈을 파는 일이 없었다.
대학 이외에 연구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이렇다 할 연구소나 연구시설이 많지 않은 우리의 경우 대학은 학자를 위한 최적의 안식처이다. 따라서 대학은 학문연구를 직업적 소명(Beruf)으로 하는 학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대학은 '신지식'이란 미명하에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고매한 인격이나 심원한 학문으로 하여 추대되는 총장과 학장이 아니라 이와는 무관하게 '나요, 나요!'하면서 출세한 자들이 대학의 진로를 좌우하고, 적지않은 교수들이 학교의 보직이나 정계나 관계의 부름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작고한 민 교수의 모습을 새삼 되새기는 것은 그날의 추도식에 참석한 자들만의 무거운 심정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추도식에서 민 교수의 초등학교 은사가 하신 말씀은 한낱 메아리 없는 질문이기만 할까. "박찬호와 박세리의 전적은 신문의 전면에 주먹만한 사진과 글자로 보도하면서도 평생을 학문 외길을 가면서 세계적 업적을 낸 민두기의 죽음은 왜 신문의 보이지도 않는 지면에 조그맣게 보도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망자를 아끼는 살아있는 이들의 바람일 뿐 민 교수가 그러한 대접을 원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고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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