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바람처럼 숲처럼

현대는 속도전이다. 속도는 곧 경쟁력이며 힘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속도라는 청룡열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린다. 그러나 한번 질주감을 맛본 사람은 속도가 더욱 빨라지기를 원하듯 최근 우리사회는 너무 속도경쟁에 혈안이 된 것 같다.

세계화시대에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개방 속도는 초특급이다. 마치 지난 수백년간 옥죄온 쇄국정책에 대해 화풀이라도 하듯 걸어잠갔던 빗장을 모두 풀어젖혔다. 외환위기 이후 불과 몇년만에 외국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이 시대에 누가 개방을 탓하랴 마는 문제는 문을 여는데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통신분야에서의 속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검색사이트 접속건수가 세계 수위를 다투는가 하면 언제부터 이동통신이 생필품으로 바뀌었는지 요즘은 개도 휴대폰을 물고 다닌다고 한다.

◈청룡열차 탄 한국인

자본주의 역사가 반세기도 되지않은 이땅에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증권시장을 보면 자본주의 종주국을 뺨칠 정도로 뜨끈뜨끈하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지난해 주식회전율이 세계최고였다고 보도했다. 1위 한국의 회전율은 347%로 2위 대만(286%), 3위 중국(130%)을 압도했으며 5위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347%라면 주식의 주인이 1년에 평균 세 차례 이상이나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한국의 주식시장이 '투기화' 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막상 수치를 대하고 보니 한탕주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주식회전율 뿐 아니라 주식의 사이버거래 비중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위라니 '주식투자는 여유돈으로 신중하게 하라' 는 경영학 원론의 가르침이 한국에서는 되레 웃음거리가 되고있다.

시민단체들의 움직임도 최근에 바람처럼 나타난 현상이다. 물론 이들의 정치참여는 당연하지만 지난번 총선에서 단숨에 낙선운동까지 벌였으니 민주주의 선진국인 일본조차 그 날렵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시위문화도 가히 폭발적이다. 선진국에서는 파업이 블루 칼라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최근 화이트 칼라들이 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속사정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학문적이고 논리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층이 완력 싸움질을 하고 있으니 이 나라에 과연 지식층은 있는지 낯이 뜨겁다. 요즘엔 한반도의 아킬레스 건인 이데올로기 문제에서도 북쪽바람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속도 빠르면 압력이 준다

그러나 속도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바람처럼 불처럼 빠르면 자칫 방향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 또 "속도가 빠르면 압력이 줄어진다"는 유체(流體)역학 베르누이의 정리처럼 오히려 힘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속도전에만 매달리다 보니 기회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더욱 만연해지고 있다. 부끄러운 기색 하나없이 말과 행동을 마구 바꾸고 이(利)를 위해서는 의(義)를 버려서라도 빨리 가려고만 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대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남의 잘못에는 추상같은 전형적인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저급한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 비판으로 유명한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최근 "한국은 근대화 초기 모든 것을 일본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최근 그 방향을 미국으로 돌리는 바람에 나이 많은 기업인들 조차 요즘은 일본말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며 하루 아침에 일본을 외면해 버리는 발빠른(?) 한국경제의 속성을 꼬집었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자

손자병법에 군대는 풍림화산(風林火山) 같아야 한다고 했다. 바람처럼 빠르다가도 때로는 숲처럼 느리고, 불과 같이 격렬하다가도 때로는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숲과 산이 없이 어찌 바람과 불 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시지프스들이여,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그렇게 헐떡이며 바윗덩이를 굴리고 있는가. 숲에서 잠시 쉬었다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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