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국도를 오르는 GMC트럭이 힘겹다. 괴력만 믿고 통나무를 적재함 높이보다 세키를 넘게 가득 실었다. 차령(車齡) 50년을 넘은 노구가 쉽게 감당할 수 없을 터. 힘겨움에 굉음과 시커먼 연기를 연신 토해낸다. 차가 달리는 속도라야 사람들이 그저 바삐 걷는 정도다.
마른 장마속 찌는 더위가 맹위를 떨친다. 폭염 불볕은 사정없이 머리 위를 내리 꽂는다. 비포장 국도자락에 서있는 떡갈나무마저 불볕더위에 기세가 꺾인듯 잎을 가지아래로 내려 떨구고 있다.
더위를 식혀줄 나무 그늘이 간절하다. 그러나 일월산 나무들은 그럴 여력이 없다. 일제때와 60, 70년대 벌목은 동편 일월산 수림의 세(勢)를 꺾어 놓았다.
국도 31호선 영양터널을 빠져 나오면 곧바로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오미마을과 우련전을 만난다.
오미마을 초입에는 1천여평이 족히 넘을 벌목 적치장 흔적이 있다. 계곡과 붙어 있는 이곳에는 GMC트럭이 밤낮을 다녔던 산판로도 남아있다.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진흙길. 이 길로 옮겨진 일월산 나무 대부분은 다시 봉화 춘양으로 실려가 '춘양목'이 됐다.
우련전 계곡으로 난 산판길은 온통 낙엽송림이 들어차 있다. 이곳 주변도 70년대에 대규모 벌목이 있었다.
소나무 벌목후 심겨진 낙엽송이 마치 원시림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곧고 무성하게 뻗어있다. 중턱에서 베어진 소나무 썩은 밑동을 발견하기 전엔 누구라도 원시림이라 착각한다.
띄엄띄엄 앉아있는 썩은 밑동. 족히 한아름은 넘는다. 벌써 사그라졌을 법도 하지만 백년세월 지킨 몸통을 톱날에 잃은 한일까. 하릴없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오랜 풍상이 아름드리 밑동을 썩은 푸성귀로 만들어 놓았다. 이름 없는 잡풀이 밑동을 거름삼아 자라고 있다. 분별없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묻어나는 듯해 손으로 만지자 푸석푸석 갈라져 내려앉는다.
일월산 초행에 나서는 등산객 열중 여덟이 찾는 이곳 계곡은 산판의 생채기가 너무 깊어 경북 제일의 명산이라 하기 무색할 지경이다. 수려한 풍광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시큰둥 실망한다.
당시 목상이었던 독림가 김영호(63·송방자연휴양림 대표·영양군 수비면 수하리)씨는 "당시 직경 25∼50㎝의 우량 소나무들이 거의 벌목됐다"면서 "이런 나무둥치 10여개(4그루)만 실으면 4.5t GMC트럭이 한차 가득"이라 회고한다.
우련전 산판길은 계곡을 따라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을 지나 울진·영양과 접경지인 옥방마을까지 이어졌다 한다. 이젠 주변의 석회광산 채굴차량들이 산판차 대신해 간간이 오간다.
일월산 벌목의 또 다른 현장. 일월면 용화리 아랫대티 마을이다. 일월산 동북릉 자락에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70, 80년대의 대대적인 벌목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골짝 능선마다 서있는 낙엽송. 무언가 꼬인 게 있는 듯 몸을 비틀어 쓸모 없는 '리키다'소나무들. 우량목들이 베어진 자리엔 쓰잘데 없고 볼품 없는 나무들로 채워졌다. 대체 조림을 한답시고 했지만 생색 땜질이었다.
용화리 마을 국도 곁에 허름한 함석판자집. 벌목이 한창이던 시절 인부들로 북적이던 술집이었다. 지금은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초로의 농사꾼이 살고 있다.
함석 벽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일월집'이란 식당 이름이 보인다.
일월집 앞 국도 건너에는 벌목 적치장으로 사용됐던 너른터가 있다. 지금은 영지버섯 재배용 하우스가 들어섰다. 주변에는 이런 적치장이 10여 곳이나 있다. 화전으로 변한 곳을 치면 족히 20개는 되었다니 무릇 얼마나 많은 나무가 베어졌을까는 상상하고도 남으리라.
적치장 주변에는 인부들의 숙소인 텐트촌이 형성됐다. 이들에게 밥을 제공하는 한바집도 대규모로 자리 잡았다. 막노동보다 힘들다는 산판일이다 보니 인부들은 자연 막다른 인생을 살다 모여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더러는 알뜰히 노임을 모아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생계비로 보내기도 했지만, 십상 투전과 술판으로 날렸다고. 그래서 산판 한바집의 기억은 항상 화투 노름과 독한 소주에 따랐던 누릿한 돼지비계 안주로 반추된다.
이 마을주민 박주선(55)씨는 "70, 80년대 영림계획과 솔잎혹파리목 제거 등 서너차례 이어진 대량 벌목으로 일월산이 아주 나쁘게 변했다"며 돈벌이에 급급해 나무를 도륙한 인간의 욕심을 개탄했다.
벌목 인부들은 5∼10여명씩 산을 올라 나무를 베어냈다. 이 작업에는 자연환경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염려도 무시됐다. 그저 몇 푼의 노임만 주면 나무는 언제라도 자를 수 있었다. 계곡마다 반출인장을 찍는 사람과 목도하는 사람들의 "어영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이상 베낼 나무가 남아있지도 않았고 산판이 사양업으로 물러앉은 후에야 도륙도 멈췄다. 멀어야 15여년전 일이었다.
지금도 이곳 계곡에는 벌목 운반에 사용됐던 함석판자와 쇠밭줄이 나무사이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68년 산림청 신설과 함께 전국 국유림에 대해 세워진 영림계획.
당시 일월산 국유림을 대부 받은 (주)삼풍제지측 문모씨와 경북도청 산림계장이었던 구모씨가 벌목(伐木)을 목적으로 세웠던 것이 영림계획이 됐다 한다. 남벌의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일월산의 벌목은 1930년대 일본인들이 갱목용과 침목용으로 베어내면서 시작돼 60, 70년대 영림계획, 80년 중반 솔잎혹파리 피해목 제거 등으로 50여년간 계속 됐다. 그사이 도벌도 극성이었다.
일월산 수림이 활잡목으로 변하면서 80년초반만 해도 년간 50여t 이상이 생산되던 송이버섯이 지금은 고작 3~4t이다. 영양사람들은 실제 송이를 텃밭의 채소먹듯 했으나 지금은 도회지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금싸락 같은 돈을 줘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씁쓰레하게만 느껴진다.
---춘양목의 뒤안길
"일월산에도 100자(약 30m)가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적송, 육송)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곱게 뻗어 그 위용을 뽐냈었지. 일반 소나무 보다 비틀림이 없고 벌레가 안 먹고 잘 썩지 않아 예전에 궁궐을 짓는데 많이 이용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제 일월산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지…"
30여년을 목재상으로 일했던 김일수(66)씨는 일월산에서 생산되던 적송에 대한 자랑과 안타까움을 되뇌인다.
영양과 울진, 봉화에서 자랐던 소나무에 대한 별칭은 유난히도 많다. 태백산맥 금강산 소나무란 뜻의 '금강송(金剛松)', 해송(海松)의 반대 개념으로는 '육송(陸松)', 수형이 곧고 재질이 좋으며 심재가 많고 붉은 소나무라고 해서 '적송(赤松)'등.
"1930년대까지도 춘양 태백산, 울진 통고산, 영양 일월산 일대에는 '춘양목'이라고 불린 적송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지. 그러나 1940년대 초 왜놈들이 이들 적송들을 숱하게 베어갔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나무들도 6·25전쟁뒤 혼란기를 틈타 도벌꾼들에 의해 잘려나가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어"
한평생을 춘양에서 살았다는 권태일(79)할아버지가 회고한 춘양목의 내력이다. 춘양역이 생겨나기 전부터 춘양은 적송의 집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이곳에 모인 소나무는 모두 춘양목이라 이름 붙었다. 지난 1955년 영주∼춘양간 영춘선(이후 철암∼강릉까지 연결돼 영동선으로 개칭됨)이 개통된 뒤 춘양역이 목재 집상·수송의 중심이 되면서 춘양목의 명성이 더욱 유명해 졌다.
전국의 내로라는 목재상들은 춘양 일대로 모여 들었다.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다보니 언제나 흥청망청하고 왁자지껄 했다. 춘양역에서 35년 동안 목재 등 화물을 취급했던 이현종(76)씨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춘양 일대 역 주변에는 대여섯군데의 색시집과 수십군데의 선술집이 있어 밤이면 불야성을 이뤘지. 목재상들과 공무원, 산판꾼, 벌목공들이 나무젓가락에 장단맞춰 부르는 노래소리가 끊이질 않을 정도로 경기도 좋았지…"라며 당시의 상황을 일러줬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