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10

일월산 어느 골짝도 50여년전 좌·우익 이념대결과 전쟁포화 속에 벌어졌던 피의 역사와는 자유롭지 못하다.

지리산, 태백산이 그러했듯이 일월산도 1949년 대구와 포항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소속 군사반란을 도화선으로 빨치산이 태동, 한국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처절한 동족상잔의 기록을 남겼다.

일월산 빨치산부대 대장 김달삼(金達三). 김달삼은 제주도 출신의 제주인민해방군 소속 남로당 지구당 총책임자였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48년 5월10일 미군정 주도하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막기 위해 촉발된 대대적인 무장봉기(제주 5·3사건)에서 시작된다.

진압과 토벌이 극에 달하던 그 해 10월경 김달삼은 제주를 탈출, 월북해 '남조선출신(남로당) 대의원 선거를 위한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다.

김달삼은 이듬해인 49년8월 태백산을 거쳐 일월산으로 월남, 일월산 빨치산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김달삼이 주도한 일월산 무장빨치산부대의 근간은 국방경비대 6연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대구와 포항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6연대는 여순반란사건의 진압과 지리산 빨치산 토벌의 출동 훈련으로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이 부대 입대 전부터 좌익에 영향을 받았던 군인 100여명은 1949년 1월30일 무기고를 점령,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포항인근 청하지역으로 집결, 1주일만에 강구와 영해·병곡·창수면 등 4개지역을 현지 비무장 좌익세력과 규합해 장악한 후 창수령과 명동산을 넘어 일월산으로 북상했다.

반란군들은 일월산을 중심으로 간헐적인 사상투쟁을 펴오고 있던 좌익세력과 청송군 보현산 일대 빨치산을 합류시켜 '경북지역 제3병단'이란 빨치산부대를 형성, 김달삼의 휘하에서 태백산과 일월산을 오가며 본격 무장투쟁을 벌인다.

그 해 9월들어 인민해방군 소속 장교인 이호재가 이끄는 인민유격대 병력 100여명이 합류, 총병력 500여명의 '인민유격대 제1군단'으로 부대가 확대 개편된다.

김달삼부대는 일월산 동화재 능선에 본부를 마련하고 칠밭모기와 일월면 용화리 장군봉, 수비면 한티재·창수령을 거쳐 석보면 포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을 따라 활동 근거지를 마련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에 참가했던 박종한(70·봉화군 재산면 동면2리)씨는 "일월산 빨치산들은 영양과 봉화·울진 등 3개지역을 활동무대로 삼았다"면서 "재산면 동면리 일월산 동화재 자락에 군당(軍黨)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일월산에 본부를 차렸던 것은 영양과 봉화에 접경하고, 울진과 안동으로 진출하기가 용이한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처져 외부와 차단, 군정경찰과 행정력의 간섭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양 지역사회의 사상적 흐름 및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유서깊은 명문가 문중세력을 중심으로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일찌감치 좌익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지방인민위원회'가 결성돼 빠른 속도로 사회질서를 장악해 나갔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청사·1986)' 하권에는 "경북 영양군의 경우 군민 80%가 인민위원회에 소속돼 있었으며 군민들도 인민위원회를 신뢰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청기면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장현(가명·78)씨는 "해방 이후 자치조직이 급속도로 안정되고, 우리는 모든 토지는 농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 일본인과 한국인 대지주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둬들이고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관철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이들 인민위원회 소속 좌익세력들은 1948년 8월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양성적인 활동을 해오다 이후 산 속으로 숨어들어 초기 비무장 빨치산 활동을 폈다. 이 같은 여건은 봉화지역도 비슷했다.

1949년 2월 토벌대와 빨치산이 벌인 청기면 당리재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청기면 당리 마을 주민 강석호(65)씨는 "1년여 동안 안동으로 연결되는 장갈령재의 통로인 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같은 해 보리 이삭이 팰 무렵 봉화경찰과 대한청년단 50여명은 일월산 동화재를 넘어 일자봉까지 진입,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이날 전투로 빨치산 15명이 죽었으며 김달삼 주력부대는 강원도 산악지대로 쫓겨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여름. 이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김달삼부대는 태백산에서 다시 일월산으로 진격해 후방 무장전투를 계속해 나갔다.그해 가을 국방경비대가 또다시 영양을 접수하고, 초겨울부터 일월산 빨치산에 대한 대규모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 일대 산촌민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영양군 일월면 오리 노루모기 마을의 김기일(61)씨는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백부와 장인을 한꺼번에 잃었다. 빨치산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마을은 모두 불태워졌다.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박인화(62)씨도 마을에서 쫓겨 현동리 새터마을로 나갔고, 피난자 여럿이 토굴속에서 한꺼번에 자다 갓난애기가 사람에 깔려죽는 것을 목격했다 한다.

소탕작전으로 생포된 일월산 빨치산 30여명은 이듬해인 1951년 4월 영양군 서부리 팔수골 초입 산자락에서 집단 총살돼 그 자리에 묻혔다고 전한다. 지금은 여관과 집들이 들어서 있다.

조원기(76·상이군경회 영양군지회 회장)씨는 "지금의 영양병원 뒷쪽에서도 5, 6명의 빨치산들이 총살당해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증언하고 있다.

1951년 11월14일 봉화 군경토벌대가 일월산 동화재 자락 다래바위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김달삼부대를 공격, 섬멸하면서 끝을 맺기까지 3년동안 일월산 자락에는 이념대결에 의한 반목과 질시가 광풍처럼 소용돌이 쳤다.

이 여파로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의해 양민 300여명이 죽음당했고 90여명이 인민군과 빨치산 패잔병을 따라 자진 월북했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들도 130여명에 이르며 지금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220여명이나 된다.

지금도 일월산 동화재자락 다래바위 부근에는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정찰바위와 동굴, 훈련장 터 흔적이 남아 아픈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토벌대 활동했던 주민 박종언씨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수시로 바뀌는 지배구조 아래 양민들이 당한 고초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의 역사였지"

일월산 빨치산들을 소탕하기 위해 10년 넘게 공비 토벌대원(유격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족상잔의 현장 한복판에 서 있었던 박종한(70·봉화군 재산면 동면리)씨.당시 봉화 재산면 동면리와 갈산리 사람들은 밤이면 빨치산들이 내려와 곡식과 옷가지 등을 약탈해 가거나 방화를 일삼았다. 낮에는 또 군경 토벌대가 들어와 빨치산에 협조한데 대한 보복과 빨갱이들을 찾아내라는 닦달의 악순환 속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쪽사이를 곡예하듯 살아야만 했다.

"선친이 반장을 지내 우리 가족들은 빨치산들에 의해 반동으로 몰렸다. 할 수 없이 17세 때 대한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후 29세까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월산 일대는 안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며 20여명이 넘는 빨치산을 생포하거나 사살했다"는 박씨.

"영양 주실마을에서 식량 등을 약탈한 빨치산들이 일월산 다래바위를 넘다 우리 토벌대를 발견하고 추격해오는 과정에서 총탄이 머리를 스쳐 죽을 뻔 했다" "집안에 식량과 옷을 약탈하러 들어왔던 빨치산을 동생과 함께 생포해 지겟고리에 묶어 취조하고 보니 이름이 최종한으로 같았다"며 기구한 운명을 들려준 박씨는 수많은 아픔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상념에 잠긴다.

오래되어 낡아 해질대로 해져 달력 뒷장에 붙여 장롱 깊숙이 보관해 오던 생명과 맞바꿔 받은 표창장을 내보이면서 "내가 죽을 판인데 빨치산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박씨. 그는 "6·25당시의 시대상황때문에 일월산 자락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월북자 가족들이 이제 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맞아 분단의 멍에를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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