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15)

추석을 지낸 일월산이 초가을 문턱에 들어섰다. 긴 여름동안 이어졌던 염천도 한풀 꺾인 듯 아침 저녁이 서늘하다.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했던 무더위가 저만치 물러났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는 아쉬움인 듯 등줄기에 쏟아지는 한낮 뙤약볕은 아직도 여름 기운 그대로다.

여름내내 별러 온 범굴로 향했다. 청기면 찰당골에서 일월산 동화재 능선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솔길. 이내 이마에 땀이 흐른다. 호랑이도 이 길을 다녔을까. 서너시간을 올라서야 오솔길이 끝나고 곧게 뻗은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 찬 울창한 원시림이 이어졌다. 백호출림(白虎出林)인가. 병풍처럼 세워진 절벽 아래서 바위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범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굴안을 들여다 봤다. 양쪽이 트인 굴. 마치 사람이 만든 듯 천장이 반듯하다. 깊이 4m, 높이가 1~1.5m. 시퍼런 눈을 부라리며 표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냥 텅빈 빈굴일 뿐이다. 신혼 첫날 소박받고 쫓겨 난 황씨부인의 눈물을 닦아 주고 등목을 태워 준 전설속의 호랑이. 그 호랑이가 살지는 않았을까.

동화재를 훌쩍 뛰어 넘고 황씨부인당을 스쳐 영주 소백산과 봉화 청량산, 청송 주왕산을 수시로 드나들었을 게다. 백두대간을 마음대로 뛰어 다녔을 게다. 일자봉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표효했을 법한 일월산 호랑이. 어디로 갔을까. 동행한 영양군청 직원 권경도(52·영양읍 동부리)씨가 말을 건넨다.

"1960년대초 일월산 일자봉 정수리를 밀어 군사시설이 들어 설 당시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호랑이 울음소리가 일월산 자락을 뒤흔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영역을 파괴하는 인간에게 항의한 게지요" "일월산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랑이는 곧 산신령입니다. 일월산과 자신들을 지켜주는 영험을 갖고 있다고 모두들 믿고 있지요"

그렇다. 우리네 민초들은 호랑이를 산짐승으로 보지 않고 수염이 허연 산신령으로 대했다. 산신각 벽화마다 어김없이 호랑이가 등장한다. 황씨부인당도 그렇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범이 물어 간다고 믿었다. 있는 자들이 믿는 종교보다 더 신성시했다. 가진 자들이 마구 짓밟아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상징하는 범을 믿고 착하게만 살아 왔다. 모질고 질긴 삶을 이어 온 그네들. 민초들이 바라는 새 세상을 여는 희망으로 여겨 왔다. 일월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호랑이가 '산할아버지'다. 신령함과 성스러운 존재. 일월산 무속신앙의 특이한 이중적 구조도 바로 여기에 기인된 것은 아닐까.

범굴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 왔다. 금세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 일월산 호랑이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호랑이를 봤다는 읍내 사람들을 찾았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돌아다 보니 흰바탕에 검은 점 무늬가 박힌 호랑이가 산등성이로 올라 오고 있었죠. 불과 30여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분명 모습은 호랑이인데 무늬와 색깔은 달랐습니다" 지난 98년 8월쯤 친구와 함께 안동 학가산에 올랐다가 호랑이를 봤다는 황병돈(49·영양 동화한약방 원장)씨. 지금도 그때 본 호랑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지난 4월쯤 호랑이를 봤다는 김성조(54·여·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씨도 "일월산 장군봉에서 산나물을 뜯는데 뒷 덜미가 선뜻해 돌아 보니 집채만한 호랑이가 서 있었다"며 혼비백산한 당시를 회상하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35년 엽사 경력을 가진 포수 손대웅(57·영양읍 화천리)씨는 "몇년전 일월산 용화골에 멧돼지 사냥을 나갔을 때 갑자기 멧돼지 전용 사냥개가 뭔가에 질린 마냥 꼼짝도 하지 않고 낑낑 거리며 사람 주변만 맴도는 경우가 있었다"며 호랑이 서식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일월산 어디엔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백두대간 남쪽 끝자락에 홀로 솟아 있는 일월산. 수많은 영봉을 거느리고 있는 탓일까. 지방 포수들의 이야기는 광활한 굴참나무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이 많아 지금도 멧돼지, 노루, 고라니 등 덩치 큰 짐승들이 많다고 한다. 행여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이동하던 호랑이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출몰하는 것은 아닐까. 막걸리 잔을 받은 김주환(65·일월면 도곡리)씨와 마을사람들이 풀어 놓는 눈에 찍힌 범 발자국 이야기 속에 일월산 초가을 밤은 깊어만 갔다.

이튿날 우리 일행은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한장의 낡은 사진을 구했다. 놀랍게도 사진속에는 수평쌍대 베레타 2연발 엽총을 든 30대 포수와 함께 찍힌 것은 한국표범이었다. 가끔 민화속 호랑이로 등장하는 줄무늬 대신 얼룩 반점이 박혀 있는, 바로 그 범이었다.

"남편이 일월산 자락에서 잡은 범인데 두마리 중 숫놈을 엽총으로 잡았지…. 그때 잡히지 않은 암컷 한마리는 밤마다 마을 앞산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어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요"

사진속 포수가 자신의 남편(김차한)이라고 밝힌 김순현(78·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할머니. 시집오던 해인 1944년 늦가을쯤 남편이 일경과 함께 범을 잡았다고 했다. 그러나 몇년 후 남편은 다시 범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며 긴 한숨을 지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제는 자국 경찰과 헌병 3천여명을 동원, 1915년부터'해수(害獸) 구제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산 호랑이와 표범의 씨를 말리는 자원수탈을 시작했다.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은 물론이고 일월산 일대에 서식하던 호랑이와 표범도 이들의 수탈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책을 쓴 일본인 엔도 기미오는 1915년 한해동안 호랑이 11마리, 표범 41마리를 잡았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직전인 1942년까지 호랑이 80여마리, 표범도 624마리나 포획됐다. 동원된 사냥꾼이 무려 2천300여명, 몰이꾼도 연인원 9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기막힌 노릇이다. 일제의 자원수탈이 어디까지 갔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직하다.

일월산 호랑이와 표범은 그렇게 죽어 갔다. 우리 범에게 절멸의 길을 걷게 한 장본인 일제는 호피를 벗겨 본국으로 가져 가는데 혈안이었다. 송곳니까지 뽑아 도장을 새겼다. 잿밥에만 눈독들인 그들은 민초들의 신앙과 유일한 삶의 희망까지 깡그리 부셔놓고야 말았다.

다시 보니 김 할머니의 사진속 일월산 표범은 울고 있다. 의기양양한 포수가 왠지 밉다. 덥수록한 털과 흰바탕에 주먹무늬 검은 반점. 순하게도 생겼다. 틀림없는 우리 표범. 답답하다. 끝내 왜놈들의 총탄에 쓰러져 간 의병들처럼 엽탄에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너무나 비통해하는 표정이다. 그래, 100여년전 구한말 우리 민족은 야심으로 가득한 외세들에게 그렇게 굴복했던가.

어디엔가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숨기고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것만 같은 일월산 호랑이와 표범. 이제라도 찾아 내야 한다. 그때처럼 백두대간을 뛰어 다니며 종횡무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도의 잘린 허리도 기어코 이어져야만 한다. 추석연휴를 보내고 돌아가는 성묘객들의 차량 경적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어 쳐다 본 일월산. 설움에 가득 찬 표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