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대통령 노벨평화상-김대통령 일대기

가난한 섬마을 소년이 한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다섯번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생활, 10년이 넘는 망명과 연금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신념의 정치인' 김대중(金大中)은 한국 헌정사상 처음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대통령이 됐고, 이제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대인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꽃을 피운 공로로 노벨 평화상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됐다.

제79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은 1925년 한반도 남단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네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의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뒤 목포로 유학해 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해 43년 졸업한 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했다가 45년 해방후 해운업체를 차려 불과 4, 5년만에 화물선 15척을 거느리고 목포일보사를 인수하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이어 김대중은 54년 해운노조의 지지를 받아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56년 장 면(張 勉) 박사의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입문했다.

6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사흘만에 5.16 쿠데타가 발생, 당선등록도 못해보고 정치규제에 묶이게 됐다.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朴正熙)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63년 민주당 대변인이었던김대중은 지역구를 고향인 목포로 옮겨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최장 국회발언 기록과 논리정연한 연설로 주목받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지만, 이 때문에 박정희정권의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지목된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최대 하이라이트는 40대에 제1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일이었다.

70년 10월 대통령 후보로서 처음 가진 회견에서 그는 통일정책을 언급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조차 금지곡인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도 그가 제시했던 통일정책과 무관치 않다.

71년 대선에서 46%의 지지를 얻고도 낙선한 그는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 정면도전했고, 그 대가로 국회의원 지지유세 도중 트럭 암살기도로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었으며 유신철폐를 주장하다 73년 여름에는 일본에서 안기부 정보 공작원에 납치돼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이후 김대중은 79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다가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여론과 수많은 민주국가의 압력 덕분에 특별감형돼 수형생활을 끝내고 미국망명길에 오른 그는 미국 정가에 한국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알리고 교포들 사이에 조직적인 민주화 운동을 펼치기 위해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개설했으며 하버드대국제문제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필리핀의 야당지도자 베그니노 아키노 등과 교분도 쌓았다.

85년 2월8일 망명 2년만에 귀국을 강행할때는 그의 신변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각계 지도자 20여명이 동행해 세계 식자들의 화제가 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연행돼 가택연금 상태가 됐다.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金泳三)씨와 민주화추진협의회공동의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주력했고, 87년 결국 6월항쟁의 불길이 타 올라 한국민주화의 돌파구가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야당후보 단일화 실패로 대선에서 패하고 5년 뒤 세번째 도전한 대선에서도 김영삼씨에 패해 정계은퇴를 선언,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93년 귀국해 아태재단을 설립한 그는 95년 세간의 논란속에 '김영삼 정권이 실정을 거듭하고 야당이 비판과 견제라는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치에 복귀, 결국 97년 12월18일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 승리했다.

실제로 그는 대선 승리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파동으로 시시각각 침몰의 길로 빠져들고 있던 '한국호'를 살리기 위해 경제현황 파악, 외국인 투자가 접견 등으로 눈코뜰새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실업자가 200만명에 육박해 가고 있던 98년 한국의 참담함은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로 대변됐지만 대통령 김대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국민의 저력을 믿었다.마침내 IMF 구제금융에 들어간지 1년만인 지난 98년말 무역흑자가 사상최고액인 400억달러를 돌파했고, 한국의 신용등급도 상향조정됐으며 취임 당시의 약속대로 1년반만에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그의 업적은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평화 정책이다. 잠수정 침투사건과 서해교전 사태 등 위기도 있었지만 그의 끊임없는 북한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는 결국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이끌어 냈고, 2000년 6월13일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분단 55년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상봉을 하게 된다.

그가 평생을 걸어온 고난과 영광의 삶이 노벨평화상으로 확인됐다면 남은 시간은 역사의 평가를 대비해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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