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몬떼 알반-천년의 침묵-해발 2천m 백산에 아로새긴 평화의 나라
백두산은 원래 백산이라고 불렀다. 백산은 '밝은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럽에도 백산이 있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을 가르는 정상에는 만년설이 덮여 있어 사람들은 이 산을 '몽블랑(흰 산)'으로 불렀다. 이제 나는 다시 멕시코에서 백산을 만나게 되었다. 답사단 일행이 찾았던 몬떼 알반을 우리말로 바꾸면 백산이 된다.
◈흰색꽃 물결 高山에 위치
우리의 백산은 '밝음'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일반화시킨 정신(精神)의 산이었다. 유럽의 백산은 광물질인 흰 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멕시코 인들은 식물성 백산을 가지고 있었다.
남한 땅 만한 넓이의 와하까 주 수도에서 10㎞ 쯤 되는 곳에 해발 고도 2000 미터를 넘는 유적이 있다. 산 정상일대 60여 만평에는 나지막한 관목인 "고빨 나무"의 흰색 꽃이 뒤덮여 있어, 몬떼 알반(흰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여기서 살던 사포떼끄인들은 흰 꽃이 피는 이 나무로 아름다운 소리의 의례용 악기를 빚어냈고, 그 소리를 머금은 신의 형상을 새겨가면서 세월을 누렸다.
온통 흰색 꽃으로 덮여 있는 이곳을 사포떼끄인들은 신성한 장소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장소를 '군주의 언덕' 이라 부르며, 이 곳에 신성한 붉은 색으로 신전과 무덤 건물들을 지었다. 흰색 꽃과 붉은 건물이 한데 어울려 사방을 뒤덮었을 당시의 장엄한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곳의 사포떼끄인들은 계곡 전체에 축대를 쌓아 집을 지었다. 옆에는 축구장도 따로 있었다. 일반적으로 집은 사각형으로 지어져 마당 한복판에는 희생제물을 세워놓았다. 청동과 주요 광물들로 만든 방울 달린 뱀 형상이었다. 그리고 동쪽 가장 중요한 자리에 십자형의 무덤건물이 있었다.
◈신전.무덤즐비…축구장 눈길
무덤 안에는 벽을 모두 원색으로 칠하고 그 안에 사제와 신의 상을 만들어 넣었다. 여기에 그 집에 살고 있는 식구들 형상도 빚어 넣었다. 또한 많은 토기와 보물도 넣었다. 그리고 뼈에는 붉은 색을 칠했다. 그들은 붉은 색이 저 세상의 태양색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집을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으로 함께 썼던 것이다.
그들은 평균수명이 마흔 다섯 살 정도였고 키는 1m 65㎝ 안팎의 자그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오르기 힘든 산 꼭대기에 신전과 무덤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꼭대기의 신전과 무덤들만이 세월 속에 색도 빼앗기고 유적으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몬떼 알반 문화는 멕시코 유적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었던 까닭에 천년 이상의 침묵 끝에 겨우 지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몬테 알반에 오르자 우리는 익산 미륵사지보다 훨씬 넓으면서도 건물이 가득 찬 유적과 마주 대하게 되었다.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그러나 남과 북을 대칭으로 하고 있는 이 유적에는 중앙광장, 관측소, 신전 등 모두 26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문명은 공자가 태어나던 무렵인 기원 전 500여년 경에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가던 시기(500~700년)에 가장 전성하여 주위의 모든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9세기경 이들 신전은 갑자기 버려졌고, 그 뒤에 믹스테끄인이 왔었다. 그러나 식민 정복자들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전설에 속하는 유적이 되어 있었다.
이 유적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유적 자신이 긴 세월의 자욱을 그대로 이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일찍 지어진 남쪽 신전, 그 다음 동쪽 유적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서쪽과 북쪽 유적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유적에는 무덤 건물이 200여 채나 있고, 신상(神像) 및 사제상이 300여 개가 나왔다. 이러한 조각들이 시내의 산또 도밍고 박물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돌 벽돌처럼 다듬어 사용
사뽀떼크인들은 돌로 건물을 세웠으면서도 굳이 그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사용했다. 계단식 축대를 쌓아 건물을 지으면서, 계급에 따라 층지어 살았다. 계곡의 아래쪽에서는 생산을 하고, 그 위에서는 제사와 정치를 하면서 지냈다. 지배층이 살던 곳에는 저수지, 수로, 길, 방호벽 등을 잘 설치했다. 그 예로 남쪽 광장에는 높이 2m, 길이 90m나 되는 반지하로 된 저수지 흔적이 있다. 하늘에서 비가 충분히 오지 않는 이곳의 기상조건을 감안해 보면, 아랫사람들이 결국 이곳에 물을 길어다 채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만은 매우 예민하고 치열했다. 이 유적의 남서쪽 광장에 부조(浮彫)가 새겨진 1m 되는 돌판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부조를 처음 발굴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춤추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임산부의 배 안에 있는 아이, 불구자들, 쌍둥이 등 그들은 주로 비정상적이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인간들의 모습들을 새겨 놓았다. 이 부조를 새긴 상인이나 의사, 예술가들은 병을 치료받고 싶은 기원이거나, 아니면 그 병을 앓다가 죽어 버린 아끼는 이들을 그리며 이를 조각했으리라.
◈생명 중시…인신공양 기피
당시 멕시코 전역에서는 축구를 비롯한 경기에서 이긴 사람의 심장을 신에게 바치던 인신공양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은 장한 자신의 모습만을 후손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랬고, 영원한 내세에서 언제나 승리자로 지내려 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삶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될 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공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뽀떼끄인들만은 인신 공양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축구장 모습도 차이가 난다. 그들은 산 사람대신 제사 때 썼는지, 진흙과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많이 빚었다. 그리하여 이 형상 안에 그들 자신의 모습과 신의 모습을 담아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들은 올빼미를 고귀함의 상징으로 여기고 살았다. 유럽사람들도 올빼미를 지혜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데, 올빼미를 존중했던 사뽀테끄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아끼는 지혜를 바르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 지혜는 몬테 알반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부드러운 흰 꽃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식물성 백산'인 몬테 알반에서 문명을 일구었던 그들은 사람이나 동물의 피내음을 결코 즐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몬테 알반 산 정상에서 평화를 사랑하며 살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물이 부족해서 산 꼭대기의 삶이 불편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그들은 와하까 시의 산또 도밍고 박물관 진열장 속에서 고빨 나무로 만든 악기와 같이 살고 있다. 지금 박물관을 누르고 있는 그들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로 가서 그들의 침묵을 역사적 수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마치 세계의 고대문명과 숨바꼭질 하는 것 같았다.
글:김정숙(영남대교수) 사진:최종만(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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