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물질로도 지극히 만족하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던 라다크에도 최근 학교성적 때문에 자살한 아이들이 몇 명 생겨났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자본주의만큼 구심력이 강한 문화도 없을 것이다. 좋은 집,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는 물질문명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다른 모든 가치들이 일단 초라하게 느껴지니까.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가정교육, 그 중에서도 여성교육이 매우 철저했다. 하지만 서구 문물이 밀려오면서 위의 라다크처럼 전통적인 가정교육은 송두리째 뿌리뽑히고 말았다. 서구식 교육만이 교육이고 나머지는 교육이 아닌 것으로 내버리고 말았고, 그래서 여성교육도 학교공부만 잘하면 끝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의 주제,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야기는 오랜 옛 이야기라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어디에서 수습해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가정 주부들의 탈선이 도를 넘어섰고, 이혼율은 나날이 높아지는 가운데, 버려지는 아이들만 늘고 있다. 그런 우리 자신에게 하나의 지침을 여기서 찾고 싶다. 지금도 온달산성 같은 당시의 지명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전설 같지만 실제로 있었던 이 이야기를 두고 생각해보자.
평강공주가 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평강공주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남들이 부르는 바보라는 이름에 끄들리지 않고, 또 마냥 바보노릇을 하는 온달의 외형에 끌리지도 않고, 언제나 온달의 내면에 숨어 있는 '사람'을 한결같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평강에 힘입어 온달은 자신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온달은 평강을 만난 후로 한결같이 꾸준하게 바보로부터 벗어났을까? 아닐 것이다. 익숙한 바보노릇이 수시로 튀어나왔을 것이고, 때로는 숨어있던 자기 힘에 놀라 거꾸로 잘난 맛에 넘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굽이굽이마다 한결같았던 것은 평강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온달 내부에 숨은 사내대장부를 보는….
아니, 어쩌면 평강도 때로는 남몰래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떠나온 궁전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택한 남자, 바보에 대한 멸시감에. 깊이 절망하며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강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 그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거기서 사랑은 시작된다.
그러면 온달의 편에서는 어떠했을까? 온달이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나서 관이 움직이질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덧저고리를 벗어서 관 위에 놓고 통곡하자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온달은 자신을 바보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준 평강에 대하여, 그야말로 태산같은 사랑으로 답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주고 받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다 스스로 짓는대로' 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맞는가 싶다.
우리는 옛날 여성들은 봉건적 억압 속에 그야말로 비주체적인 삶을 살았다고 여기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는 출세를 못하니 남편을 통해 성취한 것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야말로 정말 스스로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의 우리야말로 세속적 욕망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고, 정말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남녀간의 사랑도, 우리는 욕망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산다. 그런 사랑은 더 이상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끝나버리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끝끝내 사랑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아버지도, 바보 남편도, 극도의 가난도 평강의 주체적 선택을 가로막지 못했다.
평강은 자기가 택한 삶에 지극히 성실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참된 자기 모습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누구나 예외없이 바보 온달이다. 그러므로 평강은 오늘 또다시 누구에게나 절실하다.(김영란-'세상만들기'자치모임 협의회장·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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