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시오, 페이브먼트로 올라 가란 말이오'
'무슨 말씀? 나 지금 페이브먼트 위를 가고 있지 않소'
'아니 보아 하니 미국인 같은데 영어도 모르시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영국 경찰인 주제에 영어를 모르고선…'
이 엎치락뒤치락은 런던 시내에서 생긴 사건이다. 웬 영문일까?
이건 미국 친구가 그가 영국에서 직접 겪은 이른바, 영미간의 '언어 문제'의 보기의 하나로 들려 준 이야기다. 우리말로 보도라고 하는 것을 본토 영어에선 '페이브먼트'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선 '사이드 워크'라고 한다. 미국인이 '페이브먼트'라고 하면, 그건 본토 영어와는 정 반대로 차도를 의미한다.
한데 저들이야 페이브먼트와 사이드 워크로 옥신각신하건 말건 그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들로서는 보도(步道)다. 그러나 페이브먼트라고 하건 아니면 사이드 워크라고 하건 아무튼 보도는 그 자체로 말썽 사납다. 한 국가의 문화적인 징표며 사회적 개성들이 보도를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부 문화인류학자들은 보도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곤 거기서 재미있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들은 보도를 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의 모양새가 나라나 민족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우선 알아차렸다.
가령, 사회성이 높은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차이가 여실하게 보도에서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도는 사회성과 윤리성의 거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회성이 높은 나라에서는 물론 질서 정연하게 보도를 걸을 것이다. 앞뒤며 좌우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걸음으로써 상호간 침범하고 당하고 하지 않기 위한 안전 거리며 중립 공간을 확보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교차 보행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보도에서 마주 보고는 가고 오는 사람끼리가 부닥뜨리거나어깨를 스치거나 하는 따위 몰상식한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도에서도 좌우 통행의 원칙이 지켜지는 셈이다.하물며 남의 앞을 예사로 가로지르고 내달아나는 따위 몰염치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데 우리나라의 보도는 어떨까? 한마디로 엉망이다. 앞사람을 뒤에서부터 밀치고 가기는 예사다. 교차 보행쯤이야 항 다반사다. 좌우 통행의 원칙은 있는것 같지 않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가뜩이나 좁은 보도를 아랑곳하지 않고는 일행 두셋 혹은 서넛이 어깨동무하듯 한 줄로 서서 어슬렁대는 난장판도 벌어진다. 요컨대 우리의 보도에는 사회성도 윤리도 없다. 남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남을 예사로 침해해대는 판이니 사회성이 있을 턱이 없다.
거리의 보도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데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백화점 안이 그렇고 공공건물 안의 복도도 비슷하다.계단에서는 민망한 일이 계단의 층계 수만큼 벌어지곤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의 무리는 있으되, 사회상은 없는 사회 그게 우리나라다. 남은 으레 따돌리는 집단에 윤리를 요구하긴 무리다.그러니 거리의 보도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주식시장이나 벤처나 정치나 그저 그게 그거다.
그래서 이덕무 선생의 '사소절(士小節)', 곧 '선비가 지킬 작은 절도(節度)'라는 뜻의 책에서 본 어느 구절이 생각난다. '거리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거들랑 모름지기 그의 그림자를 밟지 않게 마음 써서 걸을지어다' 한데 지금 우리는 그림자커녕 남들을 아예 짓밟고 가는 기세니 무섭다. 한심하다.
인제대 교수·국문학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