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포럼-'위험사회'와 위험의식

8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구국가가 막을 내릴 때 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 하나가 재미있다.

미국 기자가 실패의 요인을 찾아 나섰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 원인의 하나를 찾았다.

농산물 집산지인 우크라이나에서 감자를 싣고 모스크바로 가던 트럭 운전사는 감자가 떨어져도 그냥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따라가 『왜 그냥 가느냐』고 물으니 『나는 모스크바까지 트럭을 몰고 가라는 명령만 당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중앙의 통제에만 의존했다.

이러고도 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같은 논리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도 신뢰를 중심으로 라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도요타 자동차 타카오카 공장에서는 작업라인 노동자 중에서 누구라도 줄을 당기면 전 공정이 올 스톱된다고 한다.

그만큼 하자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 그만큼 경쟁력이 있는 자동차회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권한이 남용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렇지 못한 프랑스의 경우는 현장 주임과 노동자와의 관계가 복잡한 규정에 얽매여 있어 이렇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연 신뢰비용이 더 들어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에서 화재 때와 비교해 보자. 당시 뒤늦게 중앙로 역에 들어온 1080호 기관사와 종합사령실과의 대화내용을 보면 이렇다.

사령실의 "화재가 발생했으니 조심해 운전하여 들어 오라』는 지시에 따라 들어왔다.

불이 난 현장을 보면서도 조치는 않고 『엉망이다.

답답하니까 빨리 조치 바란다.

대피시킵니까. 어떻게 합니까』하고 묻고만 있다.

심지어 사령실에서 전원키를 뽑으라고 한다고 전원키마저 빼 갖고 나왔다.

이로 인해 문이 닫혀 수많은 승객이 죽는 비극을 맞았다.

한마디로 현재까지의 기관사는 중앙 통제실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는 「로봇」의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점은 대구지하철 노조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운행 시스템이 준(準)자동화되어 있고 종합 사령실의 지시에 따르기 때문에 『기관사가 하는 일이라고는 출입문을 닫는것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아무리 법을 잘 만들어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잘 하지 못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안전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어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 잘 못하면 이 또한 그만이다.

따라서 기관사에도 얼마간의 권한과 책임을 주어 로봇이 아닌 사람으로 행동할 수 있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중앙통제 시스템이 효율성도 높고 말도 없고 탈도 적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일선에도 일부의 조치권한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상전환이 없으면 안 된다.

아니면 대구지하철 전동차 기관사 운전규범 195조에 규정된 '기관사는 사고발생 우려 시 즉시 정차하고 사령실에 보고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규범대로 훈련이라도 했어야 했다.

이 정도만 평소 했더라도 이번의 대구참사는 이토록 끔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장의 일은 현장에서 가장 잘 아는데 이를 상부지시에만 의존하였으니 이번의 경우처럼 상부가 현명하지 못했을 때는 엄청난 화를 부르는 것이다.

감자가 트럭에서 떨어지면 당의 지시가 없어도 주워야 하는 것이고 한 라인에서 고장이 났으면 하부조직이라도 줄을 당겨 작업을 정지시키는 권한의 하부이양이 어느 정도는 이뤄졌어야 선진조직이 아니겠는가.

80년대 거대한 문명이 거대한 위험을 가져온다는 위험사회를 주창해 세계적 관심을 모은 울리히 벡도 일찍이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즉 『근대 사회는 기술 선택과 투자에 관한 의사결정이 소수에 집중됨으로써 그만큼 이익을 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치명적인 위험도 커졌다』는 내용이다.

위험의 감소를 위해서도 권한은 라인으로 어느 정도 위임하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위험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한 아무리 안전시스템을 갖춰봐야 헛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인원 보강이나 내장재를 불에 타기 어려운 난연재로 바꾼다든지 안전 관리비 예산을 늘린다든지 하는 하드웨어 측면만 강조되고 있다.

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즉 의식문화도 따라가 줘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5천238억 원의 부채를 지고 있는 대구지하철 공사인 만큼 한꺼번에 안전수준을 선진국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기관사들의 자질을 향상시켜 안전효율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시민을 위한 '공무원'이 시민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살자고 빠져나오는 것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주필 서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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