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족은 없다'-"민족은 허구…만들어질 뿐"

우리에게 '민족(民族)'의 의미는 대체 뭘까?

98년쯤인가 DJ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백악관 환영만찬에서 한국 소프라노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노(老)대통령 부부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식인 중에 '민족(民族)'이란 말을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뛴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족'을 통하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외세, 분단 등 갖가지 모순을 일거에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일 것이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난해 월드컵 때 전국민이 함께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전을 벌인 것만 봐도, 한국인들의 뇌리 저 깊숙한 곳에는 '동질의식'이 뿌리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외국언론에서는 '국수주의' '파시즘'이란 얘기로 비아냥거렸지만,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 외세에 의해 남북이 갈렸고, 아직도 강대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민족'이라는 추상적(?) 구호 외에는 달리 택할 수단이 없는 게 아닐까.

그만큼 한국인에게 '민족'이란 말은 복음이자 신앙이다.

사회심리학자 고자카이 도시아키(파리 제8대학 교수)가 쓴 '민족은 없다'(뿌리와 이파리 펴냄)는 우리에게 생산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책이다.

그의 중심 단어는 '민족은 허구'라는 것이다.

민족 동일성은 객관성을 근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사상적으로 만들어지는 허구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실수로 유대인 아이가 팔레스타인 아기로 바뀌고, 세르비아인 아이가 알바니아 가정에서 자랐다고 상상해보자.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자란 유대인 아이는 이스라엘 군에 대해 결사적인 테러공격을 가하고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이다.

또 알바니아인으로 자란 세르비아인 소년은 민족분쟁이 발발해 세르비아인에게 린치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게 될지 모른다" .

이처럼 민족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혈연' '인종'이라는 개념도 주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허구의 산물일 따름이다.

결국 민족이란 '해당 집단의 구성원 및 외부의 인간에 의해 점차적으로 만들어진 범주'에 불과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공동체에 의지하려 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허구의 틀이 필요하다.

저자는 민족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같은 다민족·다문화주의나 프랑스 같은 보편주의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면서, '열린 공동체'라는 새로운 미래상을 주창하고 있다.

한 사회내(혹은 세계)에서 다수파와 소수파가 상호영향을 주고 융합해갈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휴머니즘을 창조하자는 것이다.

원제는 '민족이라는 허구에서 열린 공동체로'.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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