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맥타가트 박사

낡고 헐렁한 양복 서너 벌, 무릎 부분이 튀어나온 바지, 헤진 구두 몇 켤레, 두어 군데 꿰맨 양말…. '살아 있는 성자(聖者)' '참교육 실천자' '희생적 애타주의자' 등으로 불렸던 전 영남대 영문학과 미국인 초빙교수 아더 J 맥타가트 박사를 누군가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사실 그는 1953년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어 대구미문화원장을 지낸 뒤 40여년간의 한국생활 중 주로 대구에 머물면서 사랑의 교육을 실천했던 '벽안의 참스승'이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 독신주의자로 무소유·희생·봉사의 정신으로 일관했으며, 특히 자신에겐 철저한 '자린고비'였다.

▲1997년 영주 귀국해 만년을 고향인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홀로 살던 그가 지난 7월 15일 메릴랜드주 게이터스버그시의 한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타계, 고향의 가족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남대와 그의 장학금 수혜자 모임인 우정회가 그를 기리는 추도식을 내일(9일) 오후 영남대에서 갖게 되지만, 그의 청빈과 끝없는 베풂과 나눔의 삶은 우리를 다시 한번 숙연하게 한다.

▲1976년부터 22년간 영남대에 재직하면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뺀 월급과 연금의 대부분을 제자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았던 그는 '우정장학회'를 통해 무려 340여명(연인원)에게 베풀었다.

영남대는 외국인 임용 규정까지 고쳐 평생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려 해도 '제자들과 학교에 부담을 준다'며 사양, 책과 그림 등을 모두 기증한 뒤 라면 상자 2개분의 옷가지 등만 챙겨 귀국했던 그다.

▲일찍부터 대구에 서구의 문화예술을 알리고, 우리 것을 미국에 전하는 역할을 했던 그의 한국 문화와 대구 사랑은 각별했다.

2년 전 수집품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 보관하던 우리 문화재 480여점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한 것도 그 한 예다.

그의 작고 직전 한 제자가 찾은 병상의 책상에 놓인 책 12권 가운데 6권이 우리의 문화예술 관계 서적이었고, 대구박물관도록과 금복문화재단 관계 책자가 들어있었다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에게 대구는 자신의 말대로 제2의 고향이었다.

실제 명예시민이기도 했다.

남긴 일화와 미담들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우며, 작고 소식을 들은 친지들의 칭송 역시 자자하다.

1985년 그의 고희 때 대구의 친지·제자들이 펴낸 '맥타가트 박사-생애와 일화'에 실린 글들만 보더라도 성자와 같은 면면들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그의 헌신과 이웃 사랑, 베풂의 한평생은 '이기적인 욕망에 찌들고 혼돈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등불'로 길이 기억돼야 하리라.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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