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이틀째인 29일. 어제 안면을 텄으니 오늘은 말 걸기가 수월하리란 기대를 갖고 동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믿었는데 하루를 넘기자마자 언제 보았느냐는 표정으로 시선을 비껴갔다.
배구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북측과 호주의 경기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잡은 응원단은 이내 그 특유의 응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국도 빛내리, 청춘도 빛내리'라는 구호와 박수소리를 중간에 넣어 '사상, 투지, 속도, 기술'로 이어지는 구호는 그들의 선수들에게 보내는 최대의 격려로 보였다.
휴식을 겸한 간식시간에는 어느 선수가 좋다느니, 또 어느 선수가 잘 한다느니 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조잘됐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이성에 관심이 많은 전형적인 젊은이들 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배구 준결승이 벌어졌다.
응원단은 이 경기에 참여하러 온 것이었다.
연수원에 남아있던 취주악대까지 합세했다.
북한 응원단이 총동원된 것. 게다가 대한민국 서포터스와 아리랑 응원단, '녹색군단'이라고 현수막을 내건 대학연합응원단 등등의 응원단체, 그리고 미국 서포터스까지 들어오니 경기장 전체가 꽉 찼다.
남측을 응원할 때에는 북측을 응원할 때 나왔던 구호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응원단은 한국 선수들의 명단을 인쇄한 종이 몇 장을 돌려보면서까지 선수 하나하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통쾌하게 승리하자 응원단도 즐거운 분위기였다.
탑승한 버스의 출발을 기다리면서 단원들은 이름은 모르지만 아까 돌려보았던 인쇄물에 적혀있던 순서에 따라 4번 선수가 제일 좋았다느니, 5번 선수가 제일 좋았다느니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미국 서포터스. 왜 우리나라에서 외국과 경기를 하는데 조국을 응원하지 않고 외국을 응원하느냐는 것. 미국을 응원하는 응원단은 강제로 시켜서 응원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미국이 좋아서 응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우리가 벌어놓은 잔치에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설명했다.
자원봉사자들이 국가들마다 책임을 맡아 응원한다고 설명하니 수긍을 했다.
저녁에 펼쳐질 남북합동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연수원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개별적으로 응원단원과 만날 기회를 엿봤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숙소로 총총히 사라진 응원단원들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3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연수원은 고요했다.
로비를 어슬렁거려 보기도 하고 창 너머 보이는 응원단원들의 숙소를 쳐다보면서 눈을 맞추기를 기다려 보기도 했다.
연수원에서도 응원단원들의 숙소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특별히 분리대를 세우거나 칸막이를 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응원단원이 묵고 있는 방 근처에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북측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함부로 사생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특히 연예인의 집 침대보 색깔까지 알아내려는 남측의 황색 저널리즘은 그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 필자가 동행하면서 기념 삼아 찍는 사진도 간섭했다.
예를 들어 버스 속에서도 단정하고 준비된 모습은 얼마든지 찍어도 좋지만 졸고 있거나 먹는 장면은 담지 말라는 것이다.
오후 공연을 준비하러 나온 단원들에게 "두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너무 조용하더라, 낮잠이라도 잤느냐"고 던지는 질문에 "안 잤다"는 한 마디 외에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 빈 시간에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동행하면서 보고자 했던 것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부분이었다.
단원들과 어울려 같이 밥을 먹고 싶었고,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에 편하게 입는 옷을 보고 싶었고, 끼리끼리 어울릴 때에 노는 놀이를 같이하고 싶었다.
단체 생활 중 삐져나오는 개인적인 행동과 생각을 보고 듣고 싶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이 말하는 예의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류공원 야구장에서 펼쳐진 남북합동공연에서도 그들의 담담한 모습은 계속됐다.
남측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문화적 충격을 받아 놀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단원들의 표정에선 말이 없었다.
과장해 말하자면 미동도 않은 채 공연장면을 집중해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이 있을 때 아주 미약하게 술렁거림이 있었을 뿐. 반면 북측의 공연이 진행될 때는 순서에 따라 무대를 오르내리면서 무대 뒤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다음 무대에서 공연할 노래와 춤을 연습하는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이 진행하는 동안 남측 관객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박수 등으로 호응을 보내기는 했지만, 말하자면 '보는' 것이 아니라 '봐주는'듯했다.
사실 이동 중인 수송버스 안에서 응원단이 부르는 노래들이나 테이프를 통해서 들리는 음악은 필자로서도 생경했다.
그 음률이나 가사에 감정이입을 하기는 어려웠다.
때로는 참고 견딘 적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남측 대중가요는 생경한 것이었으리라. 괴성에 가까운 음악이나 가수가 입고 나온 찢어진 청바지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의 표정은 담담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류공원을 빠져 나오는 수송버스 주위로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한번이라도 더 북한 응원단의 얼굴을 보려고,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들으려고. 북한 응원단은 오늘도 창문을 두드렸다.
붙박이창으로 막혀있는 차안에서 연도의 시민에게 화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두드리는 손에는 성의와 열정이 담겨있었다.
그들이 시민에게 던지는 환한 미소는 습관이거나 가식이 아니다.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통일의 염원에 대한 표현이고 남측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표현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밤 11시가 다 돼서 시작한 호텔 연찬회. 북측 5명과 남측 5명이 한 테이블에 배정됐다.
동행을 하는 동안 관찰을 주로 했을 뿐 실제 대화는 단답형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필자로서는 이제 마음놓고 대화해보라는 자리가 반가웠다.
"형제가 몇이냐, 아버지의 직업은 뭐냐" 등을 물어봤다.
평범한 가족관계를 물었지만 그 대답에 따라서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가정환경을 알 수 있으리라는 속내였다.
비슷한 환경을 가진 학생들만 선발되어 왔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생각보다 다양한 학생들이 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간간히 대화가 정지되었다.
몇몇 단어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던 탓. 동석한 남측 참가자가 북측에서 쓰는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하자 그 말을 받아 또박또박 대답했다.
"뭐가 어렵습니까? 우리는 남측의 말이 더 어렵습니다.
외래어가 많아서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건 실제로 그랬다.
외래어를 섞어 쓰는 것만 피하면 대화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처음 듣는 단어라 하더라도 한자어 정도라면 문맥상 의미가 쉽게 파악되었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였다.
모두 손에 손잡고 춤추는 시간으로 접어들자 그러한 차이를 인식할 틈이 없었다.
원을 그리며 서툰 발놀림으로 무용을 따라할 때나 등을 붙잡고 땀이 나도록 연찬회장을 빙빙 돌던 기차놀이를 할 때에는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동행을 마감할 시간이었다.
응원단이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치는 내일까지 계속 동행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두는 것이 오히려 감동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응원단과의 생활을 계속한다는 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정말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남측을 찾기 위해 선발되어온 이들이 아니라 북녘 땅 곳곳에서 살고 있는 일반 대중이 아닌가.
동승했던 버스에 올라 작별인사를 했다.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응원단의 환송을 받으면서 등을 돌렸다.
북측 인솔자가 마지막으로 담배라도 같이 피우고 헤어지자고 내리려다가 급히 떠나는 버스 때문에 손에 들었던 담배를 갑 채 던져줬다.
나도 서둘러 내가 가진 담배를 던져줬다.
그에게 준 '한라산'과 내가 받은 '영광'담배가 마지막 선물 교환이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북측의 담배를 빼어물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래, 이번 동행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는 방법은 찾았어.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서두르거나 안달해서는 안 되리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예의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리라'. 짧은 그들과의 동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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