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29)남겨진 후손

*西일본열도 한반도 핏불 면면히...

'서(西) 일본열도인의 10% 이상은 고대 한반도 이주민의 후손이다?'

'전체 일본인의 80% 이상이 한반도나 중국 등 대륙에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의 유전자를 지녔다'

300~600년대 대가야를 비롯해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백제 등 한반도에서 왜로 건너간 이주민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선조가 누구인지, 1천년 이상 이어온 핏줄의 역사를 제대로 꿰고 있는 것일까. 대가야 일본취재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핏줄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었다.

고대 왜(倭) 왕권의 근거지인 혼슈(本州)지방 나라(奈良)와 오사카(大阪)의 동쪽, 시가(滋賀)현. 현의 중앙을 불꽃 모양으로 길게 수놓은 비파호(琵琶湖)의 남단, 쿠사츠(草津)시 아나무라(穴村)정. 125가구가 있는 자그마한 동네다.

아나무라는 곧 아나마을이란 뜻. 주민 이시다 이치조(石田市藏)씨는 "옛날 이름은 '안라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나마을'로 바뀌었다"고 했다.

경남 함안을 근거로 한 옛 가야의 국명을 딴 동네가 일본열도 내륙 깊숙히 있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아나무라정의 한 가운데 안라신사(安羅神社)가 있다는 것. 동네 주민 50여명은 '아라가야 문화보존회'도 꾸리고 있었다.

취재진이 도착할 즈음, 주민 10여명이 안라신사 안팎을 한창 청소하고 있었다.

낙엽을 쓸어내고, 휴지를 줍는 등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선조를 모신 신사로 선조의 땅에서 온 이들을 맞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안라신사'라고 적힌 커다란 현판을 바라보며 신사 안으로 들어서자, 일주문과 누각, 비석 등이 보였다.

비석에는 '천일창명철주지성적(天日槍命轍住之聖蹟)'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메니 히보코(天日槍命)가 거처했던 성스러운 자취'란 뜻이었다.

요시다 테루오(吉田光男) 아라가야문화보존회 대표는 신사에 있는 둥근 강돌을 꺼내 들고, 안라신사의 내력에 대해 설명했다.

요시다 대표는 "천일창명은 600년대 권력투쟁에서 밀린 신라의 한 왕자, '아메니 히보코'를 지칭한다"고 말했다.

일본서기(720년 펴냄)에 따르면 아메니 히보코는 당시 자신을 따르는 시종 수명을 데리고 신라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열도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헤치고 나라와 오사카로 이주했다는 것. 그는 왜 왕권의 근거지에서 다시 시가의 비파호를 거쳐 효고(兵庫)현에 정착,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요시다 대표는 "아메니 히보코가 시종들을 데리고 이 동네에 왔을 때 시종 중 한 명이 동네의 병든 이들에게 불로 데운 돌을 헝겊에 싸서 이들을 치료했다"고 했다.

동네 환자를 치료한 신라 왕자의 시종은 바로 아라가야 출신이었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신사를 지어 그를 기렸고, 동네 이름도 안라마을로 정했다는 것. 현재 이 신사에는 아메니 히보코를 따라온 시종이 치료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 27개가 잘 모셔져 있다.

아나무라정에서 3㎞쯤 떨어진 쿠사츠시 노무라(野村)정에도 또 다른 안라신사가 있다.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멸망한 지 약 100년 뒤 신라의 왕자를 따라나선 시종들. 이중에는 아라가야의 후손뿐 아니라 대가야의 후손도 섞여 있지는 않았을까.

대가야 목긴 항아리(長頸壺) 등이 나온 시가현 반다(坂田)군 마이바라(米原)정의 '이리에나이코우(入江內湖) 유적지'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오가(多賀)정의 '키소(木曾) 유적지'. 이 곳에서는 500년대 말, 600년대 초 점토로 쌓아 올린 대벽(垈壁) 건물이 발견됐다.

대가야 옛 도읍지(경북 고령)의 왕궁 터에서 발굴한 집터와도 유사했다.

나무기둥이나 판자로 쌓은 당시 왜의 건축양식과 확연히 구분되고, 대가야 집터와 비슷하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을까.

'이리에나이코우 유적지'에서 북쪽으로 10㎞쯤 떨어진 시가현 나가하마(長浜)시의 '가키다(枾田) 유적지'에서는 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400년대 말, 500년대 초의 온돌 주거지가 나왔다.

점토나 돌로 쌓아 만든 온돌은 가야나 백제 등 한반도 고유의 취락형태인 점으로 미뤄 이 유적지를 한반도 이주민들의 정착지로 추정할 수 있다.

시가현 오사츠(大津)시 '아노우(穴太) 유적지'에도 부뚜막과 솥을 올려놓은 자리, 돌과 흙으로 쌓은 온돌 등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 온돌 유구는 현재 오사츠시 역사박물관 앞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하야시 히로미치(林博通) 시가현립대 인간문화학부 교수는 "일본에서 온돌 유적은 500년대 후반부터 700년대 후반까지 잠깐 나타났다"며 "이는 한반도 고유 취락형태의 하나로, 이주민의 유적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일본열도 곳곳에는 대가야의 유물뿐 아니라 온돌, 점토로 만든 건물, 돌로 쌓은 무덤(積石塚) 등 대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후손들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더구나 안라신사를 모시고 있는 시가현 쿠사츠시 아나무라정 사람들, 사이타마(埼玉)현 히가시마쓰야마(東松山)시의 카나이츠카 요시카즈(金井塚良一)씨 등은 스스로 가야의 후손임을 내세웠다.

대가야나 금관가야, 아라가야, 백제인을 자신의 선조로 믿고 있는 한반도의 후손들이었다.

카나이츠카씨는 "규슈((九州) 등 일본열도 서쪽 사람들의 최소 10% 이상은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원에 관한 학제적 연구'를 수행한 오모토 게이치 도쿄대 명예교수는 "DNA 분석 결과 한반도 등 도래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전체 일본인의 80%를 차지했다"고 2002년 밝혔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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