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동인은 1933년 4월부터 34년 2월까지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이란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죽음 장면부터 거꾸로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그를 너무 영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그만큼 대원군의 인생에는 극적인 요소가 풍부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고 불렸던 천의현(千宜鉉).하청일(河淸一) 등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지냈던 낙척(落拓)시절,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면서도 조대비(익종비)와 결탁해 둘째아들 명복(命福:고종)을 철종의 후사로 만들어 정권을 장악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역전 승부수였다.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원군은 '비신지례(非臣之禮)'의 특수한 지위로 재야에 있을 때 수없이 구상했을 개혁 드라이브를 과감하게 실천했다.
"서대문을 낮추고 남대문을 높이겠다"는 선언처럼 서인(노론)의 오랜 일당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정계에서 소외되어 왔던 남인.북인.소론을 등용하고, 지역차별에 시달리던 서북인과 구(舊) 고려왕조의 후손들도 등용하는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백성들의 환호를 받은 민생개혁
백성들이 대원군의 시정에 환호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가장 절실한 민생개혁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군역(軍役)개혁이었다.
부유한 양반들은 면제된 채 가난한 농민들만 그 부담을 이중으로 져야했던 군역은 조선 후기 민란의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사실상 그 해결책은 단순했다.
양반들도 상민(常民)들처럼 군역을 부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해결책은 양반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발 때문에 번번이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호포법(戶布法)을 강행해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받았다.
이로써 조선 개국 이래 현안이던 양반 사대부와 상민들 사이의 조세 차별이 해소된 것이다.
환곡(還穀)개혁도 민생개혁이자 생활개혁이었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되돌려 받는 환곡은 빈민구제책으로 시작되었으나 19세기에 이르면 지방관과 아전들의 배를 불리는 고리대로 변모했다.
대원군은 환곡에 대한 지방관과 아전의 중간착취와 횡령을 엄단하는 한편 고종 3년(1866)에는 환곡 대신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부유한 민간인을 사수(社首)로 삼아 면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했다.
관영체제에서 민간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지방관이나 아전의 농간이 개재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사환제(社還制)라고도 불렸던 사창제는 갑오경장 이후 근대적 금융조합이 출현하는 밑바탕이 될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대원군의 이런 민생 개혁에 백성들이 환호한 것은 당연했다.
대원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서원(書院) 개혁에 나섰다.
선현을 제사지내고 학문을 강의하던 서원은 조선 후기 당쟁과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중앙의 파당과 연결해 지방관을 무력화시키고 일반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관이 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는 화양동 서원같은 곳은 국왕도 어쩔 수 없는 초법기관이었으나 대원군은 고종 8년(1871)에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하고 화양동 서원을 포함해 전국의 모든 사원을 철폐했다.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상경하여 그 중지를 탄원했으나, 대원군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비록 공자(孔子)가 살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으며 주자가 살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며 철폐를 강행했다.
백성들은 이런 개혁조치들에 환호를 보냈다.
※대원군 개혁의 한계
대원군은 이처럼 정도전이나 조광조 못지 않은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개혁의 지향점이 복고와 폐쇄에 있었던 것이 대원군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개혁열차의 종착역은 시대착오적인 성리학 사회의 재건이었고 왕권강화였다.
바로 이것이 대원군 개혁정치의 한계이자 비극이었다.
경복궁 중건을 왕권 회복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그런 착오의 한 예이다.
중건 자금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과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으나 원납전은 원납전(怨納錢)으로 변질되었고, 상평통보(常平通寶)에 비해 액면가치는 100배지만 실제가치는 5, 6배에 지나지 않던 당백전은 경제질서를 심하게 왜곡시켰다.
경복궁 중건에 집착함으로써 대원군은 모든 세력의 지지를 상실했다.
호포제와 서원철폐로 양반들의 지지를 상실한 데 이어 상민들의 지지까지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대외정책이었다.
※쇄국으로 일관한 대외정책
당시 개방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조선의 상국이었던 청나라가 1841년(헌종 7년), 부도덕한 아편전쟁에 패배해 굴욕적 조건의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한 것이나 일본이 미국 동인도함대 제독 페리(Perry)의 무력시위 끝에 1856년(헌종 7년) 불평등한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현실이었다.
대원군은 이런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인식해 가장 유리한 때,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문호를 개방해야 했으나 성리학 사회를 정(正), 다른 사회를 사(邪)로 보는 그의 왜곡된 세계관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조가 남인들을 등용하고 천주교를 사실상 용인했던 것처럼 다양성을 추구해야 했으나 남대문을 높이겠다던 그는 거꾸로 유일사상 체제로 갔다.
고종 3년(1866:병인년) 프랑스 신부 베르뇌(Berneux)와 홍봉주(洪鳳周).남종삼(南鐘三) 등 수천명의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병인박해는 이런 유일사상 체제가 낳은 전대미문의 비극이었다.
이때 체포를 모면한 리델(Ridel)신부가 청나라 천진(天津)으로 탈출함으로써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제독이 이끄는 7척의 함대가 조선을 공격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프랑스 함대가 양헌수(梁憲洙)의 조선군에게 패퇴한데 자신감을 얻은 대원군은 쇄국을 더욱 강화했다.
5년 후인 고종 8년(1871.신미년)에는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 관민들에게 소각된 것을 구실로 미국의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군함 5척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조선군은 이번에도 미군을 격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미군측의 전사자가 3명인데 비해 강화수비대는 600명 중 350여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당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전쟁에서는 승리한 대원군은 이를 발판으로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계에서 문호개방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신미양요 직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는 것으로 쇄국을 강화했다.
※고립된 조선과 고립된 대원군
이는 조선을 국제무대에서 고립되게 만들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사회를 따라잡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동안 대원군은 자기만의 세계관에 갇혀 개방을 외면했다.
국내에서 양반사대부와 상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대원군은 국제무대에서도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 틈을 타고 개화파가 성장함으로써 쇄국정책은 안팎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대원군이 집권 10년 만인 고종 10년(1873), 최익현의 상소로 무너진 것은 방향성을 잘못 잡은 개혁정치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개화파가 아니라 대원군보다도 더 폐쇄적이었던 주자학자 최익현의 상소로 물러남으로써 대원군은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상실한 것이다.
※하야 후의 대원군과 우리 사회의 현실
최익현의 상소로 양주 곧은골(直谷)에 은거한 대원군은 이후 갈지(之)자 행보를 반복했다.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과 적장자 재황(載晃)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두 사건에 관여함으로써 아들 고종과도 원수가 되었다.
임오군란 때 잠시 집권했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천진으로 납치됨으로서 실각했던 그는 귀국 후인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과 결탁해 재집권을 꾀했다.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정권이 붕괴하고 친러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미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세계화의 시대에 개방에 반대하는 것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우리 사회의 일부 세력은 대원군의 시대착오와 다른 것인가. 이미 폐기된 낡은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세력은 이미 폐기된 성리학을 고수했던 대원군이나 최익현과 다른 것인가. 이미 세계사적으로 해체된 냉전논리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또다른 정치세력은 과연 대원군의 정사(正邪)구분과 다른 것인가. 역사의 격랑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것이어서 시대조류에 역류하면 수장되기 십상이다.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은 그 조류에 역류하다가 국망(國亡)을 겪었다.
FTA파동은 그런 국망이 다시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우려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개혁열차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인가. 현 정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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