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열규 교수의 '뮤지컬 '캣츠'를 보고'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무대 앞에 앉아서 꼬박 두 시간 하고도 삼십분이 번개처럼 달아나버리다니? 무대가 파하고도 나는 한동안 붙박이로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다.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 그리고 그 길고 짙은 여운까지 다 꺼지고 난 뒤였지만, 나는 무엇인가 웅얼대는 가슴을 삭힐 수가 없었다.

모처럼 만의 '맑고 상큼한 흥'이었다.

또는 '상쾌한 쾌락'이라고 불러도 좋을 기분에 푹신하게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었다.

동행이 "가시죠"라고 채근하는 소리에 겨우 도취에서 깨어났다.

무엇이었을까? '캣츠'라는 이 공연물, 이 퍼포먼스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북대구에서 고성으로 돌아오는, 그 긴 여정 내내 차 속에서 나는 줄곧 묻고 따지고 했다.

그것은 엄청난 엎치락 뒤치락이었다.

감정과 정서, 지성과 교활의 만물상같은 것이었다.

번가르는 장면마다 서로 당돌할 만큼 어긋져 보이기도 했다.

단아한 고전 발레와 현대 무용이 어깨를 겨루는 바로 곁에서는 곡예라고 해도 좋을 '아크로벗'이 난무해댔다.

선연한 오페라 아리아가 리드(예술 가곡)와 중창을 하는가 하면, 그걸 멸시하듯이 재즈가 악을 써댔다.

리듬이나 템포도 그랬다.

알레그로 비바체로 몰아붙이다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안단테 칸타빌레가 고운 선율을 그려댔다.

조(調)도 마찬가지였다.

장조와 단조가 뒤섞이다가는 필경 무조 음악의 경지에서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보는 사람을 종잡을 수 없이 잡아 흔들어댔다.

마음은 물구를 넘고 요동을 하고 격한 파도를 탔다.

로고스와 카오스가 쌍둥이로 놀아났다.

그러나 전체로는 엄청난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발휘했다.

맛나고 멋있었다.

음식으로 치면 먹을거리의 질, 빛깔, 냄새, 맛 등에 걸쳐서 갖가지, 별의 별 것을 고루 비빔질한, 한 그릇의 맛 좋은 비빔밥같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캣츠'는 보는 뮤지컬도 눈으로 지켜보는 드라마도 아니었다.

무대와 관중의 가슴과 가슴이 맞부딪치면서 심장이 함께 뛰면서 다같이 율동하고 박동(搏動)하는 놀이판, 그야말로 우리의 마당놀이며 대동굿 같은 뜨거운 놀이판이었다.

다양한 감정과 감각 사이를 넘나들면서 관중을 흔들어대고 그래서 마침내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발휘하기로는 우리의 놀이판말고도 무당 굿판과도 흡사했다.

웃기고 울리고 겁주고 달래고 하면서 가슴의 멍울을 풀게 하기로는 우리의 굿판과 '캣츠'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기에 저 가슴 저린 마지막 장면, 그리자벨라 고양이가 승천하는 장면으로 공연이 끝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난과 시련이, 혼돈과 어둠이 되레 구원으로 갈 길잡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 스펙터클의 퍼포먼스는 그래서 필경은 인간을 위한 기막힌 우화(寓話)다.

신나는 놀이판에 담은 이 교훈이야말로 가장 큰, 가장 뛰어난 스펙터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캣츠' 관람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덧붙여 우리의 전통적인 마당놀이가 서구의 캣츠와 같은 대중예술의 새로운 형식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점도 큰 기쁨이었음을 밝혀둔다.

김열규(계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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