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몰이를 할 때 소리소문 없이 관객을 불러모으던 영화가 '말죽거리 잔혹사'였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스크린에 담겨진 학교의 폭력과 억압적인 권위였다.
교복 모양새들만 바뀌었을 뿐 내가 관통했던 80, 90년대 입시생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 인기가 높다손 치더라도 왜 그리 많은 청소년들이 그 영화에 빠져들었을까. 혹시 '괴담 시리즈'로 점철된 '잔혹사'의 맥을 그대로 이어가는 지금의 교육 현실에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학 진학을 서울로 하면서 꼭 12년 만에 고향 대구로 돌아왔다. 중간에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주변의 만류(?)에도 부득불 이곳으로 옮겨왔다.
다들 서울로 떠나기만 하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어서 그런지, 대구에 머물러 있는 동창 녀석들은 종종 배드민턴을 치자, 야유회를 가자 한다. 그렇게 친구들을 종종 만나서 술도 마시곤 한다.
이런 소소한 재미와 '적성에 맞는' 연구와 강의를 하는 재미가 잘 버무려져 대구생활은 퍽이나 즐겁다. 무엇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서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숙제 다 하고 나서 가방 속에 챙겨가지 않은 듯한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이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것은 '스승의 날' 때문이었다. 학부모가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선물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교사도 아닌 내가 스승의 날이 영 찜찜한 이유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사립학교이니 그때 선생님들이 여전히 근무를 하고 계실 것이다)에 정식으로 귀향인사를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아무리 광역시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지방 도시에서 나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밀어 넣어준 일등 공신은 학교 선생님들이셨다.
그 시절 교문을 들어서면 늘 펄럭거리던 소위 '잘 나가는' 선배들의 이름들, 예를 들면 서울대 몇 명 합격, 고시 몇 회 합격. 이런 현수막들이 학교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자리를 차지하고는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가슴 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 학교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었고, 학교와 선생님들은 일류대학의 법대와 상경대에 많은 제자들을 진학시키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다시 한번 '고시 합격'이 새겨져 있는 붉은 고딕체의 현수막이었을 것이다.
역사 계통으로 공부하고 싶었지만 말도 한번 꺼내보지 못한 내게 선생님과 부모님은 법대를 고집하셨고, 그러다 찾은 협의점이 상경대였다. 학교, 교사, 학부모들이 일류대 진출이라는 신앙에 모두 삼위일체가 되어 일류대학 입학생과 고시 합격생 숫자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 그 당시 대구의 모습이었다.
어디 대구뿐이었으랴. 하지만 유독 대구가 전국 팔도에서도 가장 열심이었던 것 같다. 그 속에서 '적성'이라는 중요한 인생 잣대는 온 데 간 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생활 4년 동안 난 전공 과목에는 마음이 떠난 채, 산으로 들로, 그리고 다른 인문사회과학 학문들 속에서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 이제서야 제자리(지금은 지리학 분야에서 지역과 먹을거리, 환경문제를 공부하고 있다)를 찾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데 무려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나는 '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의 현대판 이름인 '출세'와는 이미 일찌감치 이별을 고해버린 '불량 제자'가 되어, 졸업한 학교를 지척에 두고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찾아 나서기만 한다면야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기쁘게 맞아 주실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 역시 '출세'라는 괴담에 '자기검열'을 하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가 보다.
그래서 이번 스승의 날도 이렇게 그냥 지나가고 만다. 내 스스로 '불량 제자' 딱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그리고 '괴담'이 아닌 '미담'이 학교에 넘쳐나게 될 그날이 되어야 이 땅의 '스승의 날'도 봄날을 맞이하지 않을지.
허남혁(〈사〉대구.경북환경연구소 연구기획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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