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그가 나타나기 전 책은 '귀하신 몸'이었다. 책은 침 발라가며 읽다 싫증나면 내던지는 허접한 물건이 아니었다. 일정 온도가 유지되는 신선한 자리는 책의 차지였으며 책을 만지는데는 엄격한 규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인쇄 혁명 이후 책의 운명은 180도 바뀌었다. 인쇄기술 덕분에 윤전기는 수천~수만권의 책을 쉽게 쏟아낸다. 수도승이 평생을 필사해도 50권을 복제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인쇄소에서 그리 하자가 없는 책들도 파본이라는 명분 아래 수십권씩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조란 지브코비치가 쓴 '책 죽이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책의 일생을 익살맞게 묘사해 활자의 위기를 알린다. 소설 속 화자(話者)는 '책'이다.
소설에서 책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받는 약자인 여성으로 의인화된다. 마치 조선후기 작자미상의 한글 수필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처럼….
주인공인 책은 "책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는 넋두리부터 꺼낸다. 주인공은 책이 인류와 함께 지구상에 존재하는 단 두 종의 지적 생명체라고 스스로 추켜 세운다. 책이 없었다면 인류는 야만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지만, 책은 요즘 무시당하고 있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며 비분강개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많이 데려가는 곳은 침대다. 피곤에 지친 무뚝뚝한 남편이 얼른 제 욕심만 채우고 마누라를 이내 싹 잊어버리는 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다가 졸리면 옆에다 휙 던져놓고 천연덕스럽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18쪽〉. 인간에 의해 '문명의 성채'라 불리는 도서관을 사창굴이라고 비아냥대는 것은 단연 압권이다.
책에게 도서관은 문 앞에 홍등만 달지 않았을 뿐 영락없는 사창굴의 모습이다. 어린 나이에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아무렇게나 책을 막 다루는 예의없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형식을 빌려 까발리는 책 속 출판계 풍토는 우리나라 출판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이율배반적이며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품가치가 우선일 수밖에 없는 책의 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주인공 책은 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전자책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고 비명을 지른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자아도취형 출판사 사장은 책 말미에 예언자가 말하듯 심오한 목소리로 외친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책은 죽었습니다! 시디롬이여! 영원하기를!"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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