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그래서 삿갓.립 자(字) 김립(金笠)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그가 평생을 자학하며 유랑한 이유는 바로 불효(不孝)때문이다.
당시, 고을 백일장에 응시했던 병연은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란 시제(試題)에서 단숨에 일필휘지, 장원했다.
시제의 뜻인즉, 홍경래의 난때 죽음으로써 저항한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을 찬양하고 난적에 투항, 불충을 저지른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개탄하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일곱자(字)씩 서른여섯 줄의 맨끝 문장에서 이렇게 적었다.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忘君是日又忘親/一死猶輕萬死宜)-임금을 버린 날은 동시에 조상도 버린 것이니/ 너는 한번 죽어서는 오히려 싸고 만번 죽어 마땅하다.
병연은 그 시제의 주인공이 자신의 조부이며, 멸문의 화를 입고 어머니가 근근히 도망쳐 영월땅에 숨어산 내력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 불효의 자학에서 방랑시인은 탄생했다.
집권당의 당의장 신기남 의원. 역시 조상문제만 아니면 개혁의 기수로 잘나가고 있을 터인데 그만 스스로의 덫에 걸려 버렸다.
'겐뻬이 고죠'-바로 일본군 헌병오장(伍長), 일제치하 우리 백성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부류-이것을 아버지가 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 사실보다 신의장 자신이 이것을 숨기고 거짓말 한 것이 화근이었다.
숨기고 싶었을 터이다.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다만, 그가 '과거사 규명'의 목소리를 노무현 대통령과 합창하듯 외쳐대지 않았다면, 그리고 "진실을 숨기고서는 미래의 진전이 없다" "유신의 딸이 절대다수당의 대표로 나섰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처참하진 않았을 터이다.
정치인의 처신은 이렇게 중요하다.
김삿갓은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조상을 욕보이는 불효에 울었고, '신기남'은 조상을 감싼 것이 오히려 불효가 되어 울고 말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만약 그가 역사적 사명감에 불타서 아버지의 친일(親日)을 자진신고 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을까? 천만에, 그런 못된 불효도 없을 터이다.
결국엔 정치란 놈이 죄요, 원죄였다.
"도대체 정치가 뭐기에?…"
'그놈의 정치'때문에 불효의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이 또 한분 있다.
박근혜다.
신기남은 손해봤지만 박근혜는 아버지 음덕을 크게 본 사람이다.
그러나 앞으론 모른다.
까딱하면 아버지 욕보이고 자신도 다칠지 모른다.
그러면 그 또한 불효다.
왜 '박정희'가 자꾸 들먹여 지는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개혁세력이 순항하려면 '박정희 경제'를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유신독재는 꺾었으되 경제문제만큼은 꺾지 못한 것이 현 정권의 딜레마다.
그래서 박근혜의 아킬레스 건(腱) '아버지의 과거'는 계속 건드려진다.
정치인인 딸로 인해서 '박정희 시대'의 어둠이 자꾸 들먹여지는 것 또한 불효에 다름아니다.
박정희기념관 문제도 그렇다.
냉정히 보자.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빨리, 피해와 가해의 당사자와 그 직계가족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속에서 진행돼서야 될 것인가?-하는 질문은 당연하다.
당연히 기념관은 논쟁거리 일 밖에 없다.
정권이 바뀌고, 모금액도 모자라 결국엔 현 정권의 입에서 국고지원금 취소문제가 거론되고, 구미시는 "차라리 국가사업 치우고 고향에 맡겨달라"고 까지 나와버린 상황이다.
그가 근대화의 영웅이든 독재자든 간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끼리 기념관을 추진했더라면 그만이었을 터인데 크게 놀려다가 '고양이 그림'도 못그릴 지경에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박근혜'는 이 문제에만큼은 왈가왈부, 숟가락 들고 달려들지 말기 바란다.
그가 국회의원이 아닌 보통사람이었다면 어찌 감히 짓자 말자 입이나 뗄 수 있었겠으며, 당시 이회창 총재를 상대로 걸핏하면 아버지 묘소 참배안한다고 걸고 넘어질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의 영웅 묘지 '팡테옹'에 묻힌 인물들은 사상가.예술가들이 주류다.
2차대전의 영웅 드골도, 미테랑도 거기에 눕지 못했다.
평가는 후대의 몫이다.
'뭘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평가의 절대 기준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도 이런 기준으로 했다면 박 전 대통령은 거기 눕지 못했을 터이다.
신기남 의장이든 박근혜 대표든 작금의 정치판에 몸담고 있는 그 자체가 불효다.
아니, 지금 이 판이면 지하에서 잠인들 편히 주무시겠는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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