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詩를 읽어야 하는 세상

퇴근길 자동차 라디오를 켜자 '올드 보이' 최민식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어느 보험회사의 라디오광고였는데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정말로 가슴에 와 닿더군요. 시를 음미하는 사이 그날 하루 쌓였던 마음의 찌꺼기들이 말끔하게 씻기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 인내와 고통 없이 얻어지는 열매는 없는 법이지"란 생각도 하게 됐지요.

인간만이 시(詩)를 쓰고, 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인간답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할 존재가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의 땀과 영혼이 담긴 시들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행복'을 안겨줍니다. 그 첫 번째가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지요. 시는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살갑게 어루만져 줍니다. 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의 손길이 돼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는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도 주지요.

한 때 '부통령'으로 불리며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읊은 조지훈의 시 '낙화'도 떠오릅니다. 그는 "꽃잎이 진다고 어찌 바람을 탓하겠습니까"라고 소회를 피력했다지요. 평소 애송하던 시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자신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달랬으리라 짐작됩니다.

시는 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끼리 대화를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대구 동시 읽는 어머니모임'에서 활동하는 한 40대 주부는 동시 '귀지'를 9살 딸과 함께 읽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고 기자에게 털어놨습니다. 귀에 들어오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쓸모 없는 말들이 모여 귀지가 됐다는 동시를 딸과 같이 읽으면서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겠다고 서로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막말을 주고받는 우리 정치인들도 시를 애송한다면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을텐데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시는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시는 삶에 아무 쓸모 없는 사치라고 단언하는 이들이 많고, 시는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더군요. 정말 그렇까요.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많고, 대화가 끊긴 세상이기에 오히려 시란 존재가 더욱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가을, 시를 읊다보면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요.

이대현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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