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의 뜻과 현대 과학 기술 문명
문명은 주어진 자연적 여건 속에서 더욱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하고 축적한 인류 고유의 물질적․관념적 장치다. 그런 측면에서 보통 문명을 문화와 구별하기도 한다. 그 때 '문명'은 한 사회의 경제나 기술과 같은 물리적 측면을 지칭하고, '문화'는 이념·예술·도덕·학문과 같은 정신적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구별은 엄격히 적용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한 사회의 물질적 수준과 정신적 수준은 서로 뗄 수 없는 인과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굳이 구별한다면, '문명'이 한 사회를 시간적 축에서 통시적(通時的)으로 본 발달 과정을 뜻하는 데 반해서, '문화'는 같은 사회를 공간적 축에서 공시적(共時的)으로 본 일반적 태도의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화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분적 역사를 지칭하는 데 반해, 문명은 상대적으로 더 포괄적인 시간과 지역의 역사를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명은 곧 자연에 대처하여 그것을 개발하고 정복하며, 착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류라는 종으로 진화된 아득한 과거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지속된 인류의 노력은 축적되고 발달되어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우주 정복, 인간 복제, 사이버 기술 문명을 창조하고 인류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시적으로 뒤 돌아볼 때, 시대나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혹은 한시적으로 후퇴와 멸망, 불행과 비극과 고통이 반복되어 왔지만, 실제적으로는 진보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근대의 과학 지식과 기술의 큰 틀이 잡힌 18세기 이전까지 문명의 변화와 발전은 극히 점진적인 것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 그리고 특히 20세기에 문명의 변화와 진보가 급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폭발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떠나서는 현대 문명 그리고 이 시기에 이룩한 인류의 발전과 진보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현대 문명은 과학 기술 문명이며, 세계화는 과학 기술 문명화를 뜻하며, 과학 기술 문명은 문명의 발전과 인류사의 진보를 함의한다.
▶ 현대 문명의 양면성
현대 문명의 발전에 바탕이 되었던 이 과학 기술은 이전의 기술 형태들과 다른 측면이 있다. 그 현저한 차이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다양한 욕망과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고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매우 효과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조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기차, 비행기, 전화, 컴퓨터, 냉장고, 위성과 우주선 등을 생산해 냈고,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게 했다. 또 과학 기술은 핵에너지를 만들어 냈고, 농작물을 효과적으로 생산하거나 인간의 건강을 발전시킨다. 나아가 과학 기술은 인간 복제 능력까지도 습득했다. 과학 기술의 효율성은 자명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준 혜택은 부정할 수 없다. 과학 기술의 진보와 함께 세계 전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했고, 인간들은 적어도 물질적으로 안락한 환경 속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과학 기술은 세계 전체의 모든 차원과 측면에서 거의 일상적 삶의 사실이 되었다.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만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더욱 많은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더 많은 전문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이 절대적 요구 사항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더욱 많은 과학적 지식과 전문 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것이 의무가 되었다.
이 현대 문명은, 과학 기술이 만들어 낸 기계, 컴퓨터 시스템이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거기에 광범하고 조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기술 환경'이라는 새로운 인간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과거의 문명과는 구별된다. 이 기술 환경은 공장과 기업에서의 과학적 관리법,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 생산, 매스미디어, 활발한 광고 선전, 대량 소비와 레저 등 '문명 현상'의 집합이며 산업화된 제국 간에 국경을 넘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 체제의 상위를 초월해 공통적이다. 현대 과학 기술문명은 보편주의적이며, 세계를 일체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자연 파괴는 이전의 문명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따른 기계화의 진전, 산업 혁명 이후의 대량 생산의 실현, 대공장의 건설로 환경 파괴는 급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석탄 사용, 강철 제조, 화학 공장의 대거 출현은 대기와 하천을 한층 더 오염시켰다. 이와 같이 현대 문명은 자연의 극복 과정에서 발달했지만, 그것은 결국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의 파괴 및 변형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은 고대 도시에서도 이미 나타났었지만, 현대에 와서 극단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 디지털 문명의 등장과 그 특징
이러한 현대 문명의 성격이 지금까지 아날로그적인 것이었다면, 컴퓨터와 멀티미디어 등의 발달로 이제 인류의 문명은 바야흐로 디지털적인 성격을 띠어 가고 있다. 물론, 이 디지털 문명은 20세기를 통과해 온 현대 아날로그 문명과의 결정적인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컴퓨터는 20세기적인 문명으로부터 21세기적인 문명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인터넷을 만들고 지구를 하나의 그물로 엮으며, 사이버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실체가 아닌 가상의 세계를 전개 시켰다. 이 컴퓨터의 기초가 0과 1의 디지털 체계이며, 그것은 0과 1 사이에 무한한 숫자를 나열할 수 있는 아날로그 체계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이 디지털 체계는 연상 능력을 비롯한 모든 처리 능력이 이제껏 인간이 개발할 수 있었던 어떤 이기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컴퓨터는 더욱이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고 유통하며, 그 스스로 생산해 내는 복합적인 기능이 있으며, 자체 업그레이드 기술을 소장하고 있다. 현대의 숱한 과학적, 통계적, 기술적 급진전은 바로 이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통해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날로그에 기초한 이제까지의 모든 문화와 과학과 일상의 삶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컴퓨터와 인터넷망은 인가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 주고, 실시간대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해 주며, 자본의 이동도 온라인을 통해 즉각적으로 실현시켜 준다. 소통과 처리의 속도를 더 높이기 위해 컴퓨터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며, 광케이블의 정보 고속도로가 설치되고 있다. 이제 세계는 이 초고속의 기재들로 연결되고 그것을 통해 쉬지 않고 정보와 지식과 자본이 이동되며, 경제․사회․교육․문화 등 모든 것들이 이 속도주의를 실현하도록 재편성되고 있는 중이다.
현대 문명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적인 것으로 재편됨으로써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현대 사회의 세계화와 현대 문명의 속도주의를 최대한 실현시켜 준다. 둘째, 지식과 정보가 산업과 기업의 기초가 되며, 벤처 업종이 각광을 받으면서 디지털의 발전이 무한히 펼쳐지게 된다. 셋째, 노동은 이제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수행하는 지적․정신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넷째, 이미 나타난 전자 상거래의 확산에서 보듯이 주문․생산․유통․구입의 기존 거래 형태가 사이버 체제 중심으로 바뀔 것이다. 다섯째, 컴퓨터의 자체 기능에 텔레비전, 전화, 음반, 도서관, 영화관, 상품 주문 등 복합적인 기능들이 종합된 이른바 멀티미디어의 등장으로 그 활동성이 엄청나게 증폭된다. 여섯째, 애니메이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비롯하여 새로운 예술 창작의 기법이 개발된다. 가령 문학에서도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직접 작품을 유통시키는 방식이 나올 것이다.
▶ 디지털 문명의 그림자
이런 현상들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삶이 기왕의 수십 세기에 걸쳐 형성․존속되어 온 아날로그 문화에서 벗어나 이제 디지털 문명권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생활의 편의와 풍요로움, 다양성은 급속도로 증가할 것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측면 역시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 부정적인 측면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람들은 컴퓨터와 사이버 공간에서 대면함으로써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전환되며, 따라서 인간관계의 양상이 달라지고 공동체적 관심과 공공의 연대감이 쇠퇴할 우려가 크다.
둘째, 인터넷과 각종 기기의 개발은 개인의 사생활을 노출시키고, 이미 상당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신종 인터넷 범죄들을 발생시킨다.
셋째, 기존의 풍속과 윤리, 법 체계가 급격하게 변모하면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이 발생할 것이고, 타락한 교환 가치 제일주의가 지배할 것이다.
넷째, 기업의 생산성 제고를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자본재의 확대는 실업률을 높일 것이며, 컴퓨터에 미숙한 사람들에게 낙오와 탈락의 깊은 좌절감을 안겨 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어 낼 것이지만 그 대부분은 젊은 신참자들의 것일 것이며 퇴출당한 사람들은 임시직과 같은 불리한 조건 속에서 재취업할 것이다. 그것은 '부유한 국가에 불행한 국민, 거대 기업에 가난한 노동자'란 역설을 실감케 할 것이다.
다섯째, 새로운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특히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경제적 차이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것이다.
여섯째, 유통 정보와 문화 상품은 고급한 것과 유익한 것이 적어지고 외설적인 것과 쓰레기 같은 것, 그리고 키치(저속하고 나쁜 취향의 시시한 사물과 이미지) 상품이 압도할 것이며, 스캔들과 유행의 경박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일곱째, 기존 문화 체계의 아날로그적 사유법과 인간 내면의 구조가 디지털 체계와 충돌하면서 인식과 판단, 가치 체제 전반이 동요될 것이다.
▶ 디지털 문명의 가능성
모든 현상은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이나 문제점에 대한 비관과 불신 때문에 그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문명의 빛에 무비판적으로 매료되어 맹신하고 환상에 젖어 기술 만능주의로 치달려 나가는 것 역시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새로운 문명을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은, 그러한 양극단의 편향을 모두 경계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맞고 있는 21세기의 문명은 아직까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아톰과 비트, 굴뚝과 벤처, 오프라인과 온라인,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 등이 한데 뒤섞여 있는 문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아직까지 한데 섞여 있는 아날로그 문명의 가치 체계가 디지털 문명이 초래할 수 있는 맹목을 제어할 수 있는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아날로그 문명의 가치가 21세기의 디지털 문명에 전수해야 할 덕목은 많다. 가령 인간다움에 대한 인식과 인문주의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존속되어야 할 유산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자유와 정의, 박애와 평등의 근대적 미덕과 휴머니즘적인 가치 체계와 윤리 등, 인간의 문화가 일구고 가꾸어 온 전통적인 인문주의적 덕성과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갈등과 경쟁이 아닌 평화로운 공존의 정신, 소수의 행복이 아닌 모든 인간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참된 휴머니즘의 정신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문화와 고전의 고급 예술은 사이버 세계에서 더욱 존중되어야 할 인류사적 문화이다. 전통의 힘과 자연과의 친화 정신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자산이며, 공동체 의식과 민주주의, 평등주의는 역사의 어떤 진행 속에서도 살려야 할 이상주의적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사이버 문화와 사이버 경제의 확산은 그것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 또한 제공한다. 인터넷을 통한 개인 간의 적극적인 소통과 동호인 모임의 활성화는 사이버 문화의 확산으로 인한 공동체 의식의 퇴화와 폐쇄 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또한, 인터넷 그물망을 활용한 국내외의 비정부 기구(NGO)활동의 활성화도 디지털 문명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그러한 운동은 인종, 성, 언어, 지역, 종교, 정치, 경제,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똑같은 인간적, 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우리가 아날로그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평등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엔이나 국제 적십자사에서부터 환경 생태 운동 단체에 이르기까지 국제간의 혹은 전 세계적인 연대와 협력이 이루어지는 전지구적인 실천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디지털 문명이 초래할 맹목적 변화를 제어하고 균형을 잡아 나가며 과학 기술을 참다운 인류 복지의 길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은 다른데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아날로그 문명 가운데 축적되어 온 가치 체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디지털 문명이 불러 올지도 모를 폐해를 제어하고, 그것을 통해 변화를 조화롭게 수용할 수 있도록 속도와 발전 방향을 조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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