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1970~1980년대 이 땅의 청춘들은 '유신'과 '정치군인'들의 폭압 아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다가 시국에 대한 얘기라도 나오면 먼저 주위부터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막걸리 반공법', '막걸리 보안법'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시 수많은 청춘들은 숨죽인 '안락한 삶'보다는 제대로 숨쉬고 싶어했다. 그 꿈을 심어준 사람이 '영원한 혁명가'이자 '20세기의 우상' 체 게바라(1928~1967)였다.

스콧 니어링은 자서전에서 기질에 따라 사람을 나누면서 안락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들과 결단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두 부류로 분류했다. 니어링은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쾌락을 우선하여 매사를 생각한다. 반면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은 끈질기며, 때로는 위험한 행동가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줄곧 힘겨운 노력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어떤 위험이나 방해물도 이들을 단념시키지 못한다."고 말했다.

니어링의 분류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안락한 삶을 버리고 투쟁과 고난의 길을 택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쿠바와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의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다 체포돼 처형됐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에는 한 볼리비아 여인이 "인텔리 의사가 왜 이런 극한 상황까지 스스로를 몰아넣느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그는 "나의 이상을 위해"라고 간단히 답한다.

이 '20세기의 우상'은 23세 청년 시절 낡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남미 대륙을 여행한다. 두 차례의 남미 전역 여행은 청년 의사 게바라를 개조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제국주의'의 남미 대륙에 대한 수탈과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접하고 '혁명의 씨앗'을 싹틔웠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세계의 모순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의 남미대륙 여행기를 다룬 영화가 최근 상영됐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란 이 영화는 '청년 체 게바라의 초상'이다.

이 영화 뿐 아니다. 사망 30주기이던 1997년 무렵 '체 게바라 열풍'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 등이 앞다퉈 나왔고 베레모에다 더부룩한 수염에 덮인 그의 얼굴을 새긴 티 셔츠까지 불티나게 팔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천문학사가 펴낸 '체 게바라 평전'은 요즘도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상영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발맞춰 체 게바라 전기를 비롯한 각종 체바라 관련 책들이 다시 출간되거나 곧 발간될 예정이다. 대체 체 게바라가 어떤 인물이기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 왜 한 '게릴라 전사'에게 세계가 열광하는 것일까.

'체 게바라-그 혁명적 삶'이라는 전기를 펴낸 미국 전기작가 존 앤더슨은 "게바라가 1960년대의 신화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영웅이 사라진 이 시대가 영웅의 요소를 두루 갖춘 그를 불러냈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체 게바라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에피소드를 덧붙인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건축가의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비교적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 두 살 때 발병한 천식은 평생을 따라다닌 지병이 되었지만 운동과 여행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로 부를 만큼 어릴 적부터 시에 심취했으며 1953년 초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전문의 자격증을 받았다.

게바라는 1953년 가을 미국CIA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과테말라의 진보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이 사건은 게바라가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 총을 드는 계기가 된다. 1955년 7월 그는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 밤샘 토론을 벌인 뒤 독재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키는 대장정에 나선다.

게바라와 카스트로 일행이 쿠바에 상륙한 뒤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다 다급하게 퇴각할 당시의 일화는 게바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동료가 보급품을 버리려고 하자, 게바라는 챙겨갈 것을 종용했다. 동료는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라면서 외면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탄약상자와 의약품 상자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게바라는 당시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의약품이냐, 탄약이냐, 나는 누구인가, 의사인가, 혁명가인가, 나는 결국 탄약통을 짊어졌다."

쿠바의 혁명동지들은 이 때부터 그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로 불렀다. '체'(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그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라는 애칭으로 불린 게바라는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959년 1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쿠바 혁명정부에서 중앙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한 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베레모와 낡은 군복차림으로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 나가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던 게바라가 1959년 쿠바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한 것은 해프닝이었다고 정운영은 전한다.(피사의 전망대 291쪽. 한겨례신문사. 1995) 하루는 카스트로가 "자네들 가운데 이코노미스트가 없느냐"고 혁명동지들에게 물었고 게바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카스트로가 "언제부터 자네가 이코노미스트가 되었지?"라고 되물었고 게바라는 "코뮤니스트가 없느냐고 묻는 줄로 잘못 들었다"고 답했으나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했다는 것이다.

그 뒤 공업장관에 임명된 게바라는 물질적 자극 대신 도덕적 자극을 바탕으로 한 '쿠바식 인간과 사회주의' 창조를 역설했다. 게바라는 경제에 코뮤니스트의 혁명성을 강조했지만 반대로 경제는 이코노미스트의 전문성을 요구했다. 정운영은 "게바라가 경제를 오해한 만큼 경제도 게바라의 기대를 배반했다"며 게바라의 경제정책이 실패했음을 시사했다.

쿠바에서 2인자 자리를 누리던 게바라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카스트로에게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뒤 사망설이 나돌았으나 1965년 10월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날아간 것이 확인됐고 이듬해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혁명을 위한 게릴라전에 뛰어든다. 그러나 대오를 이탈한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사선(死線)으로 내몰린다. 최후의 결전에서 17명의 대원들과 함께 미국이 지원하는 327명의 볼리비아 정부군에 맞섰으나 처절한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결국 체포돼 처형됐다. 1967년 10월8일 처형될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를 체포한 볼리비아 장교가 생포 직전 총구를 겨누며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라고 묻자 그는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 중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 시대에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이라고 게바라를 평했다. 프랑스 대통령이 된 프랑수아 미테랑도 1967년 당시 "최근 가장 충격적인 일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게바라의 죽음"이라고 답할 정도로 1960년대에 게바라 만큼 진보진영에 깊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드물었다. 현재의 쿠바를 '독재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쿠바 망명가들조차 "게바라가 쿠바 독재에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세계의 가난한 사람, 짓밟힌 사람을 위한 상징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열혈 게릴라 전사에 대한 찬사와 영향력도 세월이 흐르면서 흐려졌다. 그가 주창한 게릴라전은 남미에서조차 세력을 잃었고, 그의 사상적 뿌리인 마르크스주의도 사회주의권 붕괴로 빛이 바랬다. 그러던 그가 부활한 것은 사망 30주기를 맞은 1997년부터다. 그냥 부활한 게 아니다. 거의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쿠바의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던 게바라 티셔츠, 추모 배지, 베레모, 포스터, 흑백 사진집이 전 세계적으로 팔려나갔다.

게바라의 높은 상품성을 확인한 '상혼'도 게바라 열풍에 편승했다. 스위스의 시계회사는 자사 시계에 체 게바라를 새겨 넣었고 영국의 한 맥주회사는 상표를 '체'로 정한 맥주를 출시했다. 또 오스트리아의 스키전문업체는 이미지 광고에 게바라의 얼굴을 커다랗게 집어넣었다. "우리에게 그의 이념은 필요 없다. 그의 반항적인 이미지와 얼굴만이 관심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광고업자의 말처럼 '문화상품'으로서 게바라의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게바라 티셔츠를 입는 이유로 "단지 외형상 풍기는 그의 '저항 이미지'가 좋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게바라 열풍이 한 때의 유행이나 신드롬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으로 읽힌다. 게바라에게서 '혁명'이라는 위험한 '뇌관'을 제거하고 게바라를 바라보도록 만든 '자본의 논리'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래도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가슴 속에 체 게바라는 여전히 살아있다.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따라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게바라와 같은 인물을 다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은 체 게바라와 같은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들은 나라를 병영화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적'을 닮아갔다. 반면 게바라는 마음을 비웠고 변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압제에 대한 도전정신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 사회는 극심한 좌우 대립과 세대간 갈등을 빚고 있다. 7080세대가 주축인 진보는 보수를 '수구 꼴통'이라고 비난하고 보수는 진보를 '빨갱이', '수구 좌파'로 부르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로 먼저 변화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자기 자신 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상대를 바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 돼 간다. 변화에 몸이 능동적으로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진다는 얘기다. '나이가 곧 경쟁력'인 셈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적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이게 보통 힘든 일인가. 결국 보수냐 진보냐는 물음에 대부분 몸은 보수면서 마음만 진보를 지향한다. 그러다 몸이 보수인 것이 들통나고 '위선'이 비난을 받게되면 보수를 넘어 몸도 마음도 수구로 돌아서게 된다.

노무현 정권의 주축을 이루는 개혁론자들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개혁 피로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몸을 낮추고 게바라처럼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다. 그래야 보수도 변하고 개혁도 성공한다. 혼자 앞서 가지 말고 국민과 발맞춘 개혁을 추진해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잘 알지 않는가.

이쯤에서 개혁론자들은 '게바라 거울'을 통해 청춘의 열정과 이상을 다시 비쳐볼 것을 권한다. 게바라를 제대로 기억한다면 게바라의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죽을 때까지 가져갈 신념과 이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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