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성의 개념과 범위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리 상담 게임이 있습니다. "나는 이다."를 열 개씩 쓰는 것이죠. 학생들을 시켜보면 가지각색으로 쓰게 됩니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학생이다."에서부터 "나는 섬세한 사람이다", "나는 빵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이다."와 같이 구체적인 자기 모습까지 다양한 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보면 그 사람이 대략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죠. 물론 그 열 가지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 가지를 단순히 더한 총체가 그 사람의 정체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곱한 결과가 정체성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조용히 눈을 감고 열 가지만 써 보세요.
그 열 가지 중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성격이나 개성도 있겠지만 가족이나 청소년처럼 특정 집단에 소속된 특징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독특한 개성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가족적 성향이나 청소년으로서의 위치 때문에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는 빵을 좋아했다가 지금은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와 같이 변화된 성격도 있을 것이고, 또는 시간에 따라 과거의 모습부터 "나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와 같은 미래의 희망 사항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정체성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입니다.
▲ 자아, 주체, 정체성
그럼 비슷한 말인 '자아, 주체' 들을 구별해 봅시다. 자아는 내 자신 내부 문제와 관련된 용어이고 주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얘기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이나 의식이고 주체는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할 경우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정신적 실체가 자아인 셈입니다.
주체성과 정체성은 흔히 많이 혼동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구별이 쉬울 겁니다. 누구나 정체성은 있을 수 있지만 주체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요. 정체성은 남과 구별되는 실체만 있으면 성립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의 권리나 자존심을 내세울 줄 모르면 주체성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외국 패션으로만 온갖 치장을 했다면 그는 정체성이 강한 사람일 수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주체성은 거의 없는 셈이 되는 것이죠. 물론 정체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주체성이 강하고 주체성이 강한 사람이 정체성도 확실한 법이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기본 개념이 다른 맥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 다양한 자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
자아의 성격이나 실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체성의 성격은 달라질 것입니다. 먼저 자아를 부정적 실체로 보려는 쪽과 이상적인 자아 실현 위주의 긍정적인 실체로 보려는 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부정적 자아와 긍정적 자아
부정적 실체로 보려는 쪽은 동양의 불교와 서양 철학의 홉스가 대표적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집착과 집착을 낳는 욕망의 실체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수련을 통해 그러한 부정적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로와지는 해탈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교식 세계관은 소유와 성(sex), 물질에 집착하고 얽매이기 쉬운 인간의 물욕을 경계하고 다스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그런 자아를 벗어나고자 하는 또 다른 자아나 자기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그 과정도 힘들어 불교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이 되었습니다. 홉스도 자아를 이기적 욕망의 실체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나 감정으로 치우치기 쉬운 자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순자의 성악설과 비슷한 것이었죠. 그래서 인간들은 사회악인 불의와 전쟁을 일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욕망을 바로잡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고 얘기한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본성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직시한 통찰을 보여주었지만 사회악의 원인을 인간의 본성으로 환원시킨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학에서는 자아를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삶을 통해 실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아실현의 궁극적인 이상으로 성인군자를 설정하고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생활 잣대로 예와 인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다만 예와 인을 불평등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설정해 잘못된 인습과 관습에 얽매인 인간의 부정적 정체성을 양산해 왔습니다. 서양의 소크라테스는 지식 측면에서 실현 가능한 자아를 추구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이 보여 주듯 무지한 자아를 설정하되 그러한 자아를 반성하고 노력하는 진정한 자아를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지적인 사유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이러한 반성적 사유를 통한 근대적 자아 찾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이성을 통해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의 권력에 의해 존재 의미가 부여된 중세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 자아의 복합성, 다양한 주체
지금까지 살펴본 자아관은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측면과 자아의 실체를 단선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이나 감정 세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극복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프로이트와 라캉, 메를로 퐁티를 들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본능적 자아(이드), 현실적 자아(에고), 규범적 자아(슈퍼 에고)로 나눔으로써 인간 내부에 이미 복합적이고 다양한 층위의 자아가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본능(이드)과 도덕적 규범(슈퍼 에고)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아(에고)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프로이트가 다양한 자아의 관계 양상을 주목한 데 반해 라캉은 자아의 단계별 변이 양상을 더욱 주목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의 자아를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자아로 나누었습니다. 상상적 자아는 어린 아이가 거울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확인했을 때와 같이 인식하는 주체와 욕망이 불완전했던 시기의 자아를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상징적 자아는 언어를 배우고 나서 법이나 제도, 질서 등에 의해 규정되는 타자에 의해 자아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단계의 자아를 말합니다. 이 때 주체는 욕망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욕망은 자아의 내부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법률, 제도, 사회 규범 등 타자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하여 타자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성적인 욕망을, 라캉은 타자의 욕망을 강조한 차이는 있지만 자아를 복수로 보고 욕망하는 주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메를로 퐁티는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등의 이원론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에서 존재하는 신체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자아라는 용어는 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의식 세계 측면에서 주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적 실천과 상호 작용 차원에서는 주체라는 말을 씁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마르크스입니다. 사람은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비로소 주체가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자아 문제를 다룬 사람들에서 그러한 자아를 실천하거나 실현하는 존재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 정체성의 이중성
그렇다면 이제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한 얘기의 골자를 다시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체성은 복합적인 만큼 이중성이 강하기도 합니다. 정체성의 실체를 좀더 가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때의 이중성은 그냥 다양성 측면에서만 볼 수도 있습니다.
▲ 정적인 정체성과 동적인 정체성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헤어졌던 사람일지라도 친했던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알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뭔가가 변하지 않은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어떤 모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정체성 구성 요소 중 변하지 않는 실체는 정적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환원주의적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계속 들어도 초등학교 동창회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변하지 않은 정체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 정적인 측면에서는 정체성의 실체를 단일한 것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상황에 따른 다중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중 성격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중의 어느 하나를 진짜배기 정체성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이에 반해 동적인 정체성은 두 가지를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정체성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고 변화하는 것조차 정체성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보 사회 곧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양극단적인 정체성을 보인다 해도 그러한 정체성을 모두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죠.
▲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
개인은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은 관련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꼭 특정 집단의 종속물은 아니므로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을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의 정체성이 꼭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각 개인의 정체성이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능동적인 전략 속에서 구성되느냐는 것입니다. 쌍둥이라도 한 사람은 시민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다른 사람은 늘 혼자 외톨이로 지낸다면 두 사람의 정체성은 사뭇 달라지는 것이죠.
각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 개인이 속한 집단과의 상호 작용이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고 3이란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입시 구조에 얽매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거기에 대처해 나가는 방식은 제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얽매인 모습에서 정적인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이고 대처해 나가는 각각의 개성 속에서 동적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후자에 의해 전자의 모습도 바뀌는 것이니 두 상반된 정체성은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은 일치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치하지 않아 갈등을 겪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청소년의 정체성과 여러분 각자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생각하는 청소년 정체성과 청소년인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청소년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른들은 여러분들을 미성년자라 하여 어른들 정체성을 기준으로 여러분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안도현의 『짜장면』이란 작품에 나오는 여러분 또래의 청소년은 다음과 같이 항변하기도 합니다.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그것도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짜장면이라고 쓰면 맞춤법에 맞게 기어이 자장면으로 쓰라고 가르친다. 우둔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우리 나라 어느 중국집도 자장면을 파는 집을 보지 못했다. 중국집에는 짜장면이 있고, 짜장면은 짜장면일 뿐이다. 이 세상의 권력을 지고 있는 어른들이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배워서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을 사주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
-안도현,『짜장면』(열림원)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는 청소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겠습니다.
▶ 너와 나의 정체성을 위해
결국 정체성 문제는 사람답게 사는 문제인데 '답게'라는 말이 문제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다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고 지켜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정체성은 복합적이고 다중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청소년 정체성도 고민해야 하고 가족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나아가 한국인 정체성도 고민해야 하고 이성과의 사랑을 열망하는 성적 정체성 문제도 고민해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체성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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