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생활 보조'와 '노후생활 보장'은 전혀 다른 의미다.
1988년 국민연금제도가 처음 시행될 당시 정부는 "노후를 '보장'해 주겠다"라고 약속했지만 연금제도는 보장이 아닌 보조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됐다.
국민연금은 형평성의 근본이 되는 소득파악도 어렵고 납부예외자는 늘어나면서 성실 납부자의 부담만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 대구지사에 따르면 연금 납부가 체납돼 압류조치를 당한 건수는 지난 해 3만2천700건, 올해 1만6천570건에 이른다.
또 지난해 대구·경북지역 163만9천 명의 가입자 중 군인, 학생, 재소자 등을 포함해 소득이 없어 '납부예외자'로 신청한 가입대상자는 모두 42만9천 명(26.2%)에 이르며, 올해 12월까지는 가입자 160만3천 명 중 45만 명(28%)이 납부예외자로 신청해 작년보다 약 1.8% 늘었다.
게다가 정부는 지난 6월 '국민연금제도 개정안'을 통해 현재 연금지급액을 평균소득액의 60%에서 2005년 55%, 2008년 50%로 줄여나간다고 했다.
국민들은 그 이후에도 수급액은 줄고 납부액은 늘어나는데 대한 부담을 어떻게 해결하겠느냐고 불만을 표시한다.
정부가 제도 시행 초기에 '덜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을 믿어달라고 했지만 벌써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박모(38·수성구 수성2가)씨는 "공무원, 교직원, 군인들은 자신들의 연금 이외에 국민연금에 따로 가입해 이중수급을 할 수 있는데 서민 가입자들은 엄격한 수급권 제한과 심사규정에 묶여 있다"라고 볼멘소리를 했고, 김모(42)씨는 "서민을 옥죄는 국민연금을 차라리 폐지해서 자율 가입으로 바꾸는 게 낫다"라고 했다.
특히 매달 받는 월급에서 국민연금을 원천징수 당하는 회사원은 지역가입자와 고소득 가입자 사이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크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연금공단 대구지사에 따르면 2003년 사업장가입자의 국민연금 징수율은 99.4%, 올해는 99.3%로 지난해 지역가입자 징수율 75.5%, 올해 76.9%에 비해 평균 23.2%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원 김모(43·남구 봉덕동)씨는 "월급쟁이들의 급여명세서에서 징수되는 근로소득세, 주민세, 고용보험, 의료보험 중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라며 "게다가 일부 고소득 전문직들은 허위 소득신고로 세금망도 빠져나가고 국민연금도 훨씬 적게 낸다"라고 했다.
박모(64·서구 평리동)씨는 "1가구당 1.17명 정도의 출산율이 해결되지 않는 한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는 오히려 악순환만 반복하는 꼴이 될 것"이라며 "현재로선 폐지 말고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라고 했다.
학계에서도 국민연금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덕성여대 권문일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 대다수가 '덜 내고 더 받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소득재분배 효과가 제대로 실현되는 제도는 있을 수 없다"라며 "소득 상한선을 없애고 연금지급 상한선을 설정하는 것이 복지적 측면에서 타당하다"라고 했다.
권 교수는 또 "소득재분배를 위해선 우선 투명한 소득파악이 가능해야하는데 연금공단은 부과기준에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권장기준소득'을 '소득추정'의 절대 자료로 쓰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계명대 김한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지금도 국민연금을 '덜 내고 더 받을 수 있는 노후재테크의 수단'으로 홍보하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며 "소득 추정부터 연금제도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국민에게 솔직히 얘기하고 범국민적 이해를 구해야 한다"라고 했다.
▨건보, 직장 지역가입자 형평성 확보가 과제
건강보험 역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근본적인 신뢰회복은 보험급여 확대를 통해서 가능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보험료를 추가 인상해야하기 때문에 '보장성'과 '형평성'의 동시 실현이 어렵다는 것.
이를 해결하려면 고소득 지역가입자들의 소득파악률을 높이고, 저소득 계층에 폭 넓은 혜택이 가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민간 보험을 연계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과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내야 한다고 보건·보험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경희대 의료경영학과 정기택 교수는 "현재 건강보험 불신의 원인은 의약분업 이후 보험료는 급격히 올랐는데도 보장률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입자 1인당 보험 부담률이 3.8~4.2%에 불과해 OECD국가 평균 7~8%의 절반 수준이다보니 보험 급여율이 50%에 그치고 있다는 것.
정 교수는 "그러나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저항을 감안하면 민간보험과 건강보험의 연계가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연간 5조200억 원 규모인 민간보험과 건강보험(연간 17조~19조 원)을 연계한다면 보험료 추가 부담없이 보장성을 높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국민건강보험연구센터 김경수 연구팀장은 "현재 급여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국세청이 인력과 예산을 확보해 고소득 계층 소득파악을 높이고 보험료 인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얻는 일이 과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흑자로 돌아선 건보 재정으로 저소득층 중심의 혜택 폭을 넓히는 한편 국고부담 방식을 바꾸는 방안도 개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세환 보험개발원 선임연구원은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급여 대 비급여 비율은 60대 40으로 보장성을 높이려면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정부는 올해 흑자재정을 당장 소진할 것이 아니라 연차적으로 비급여 항목을 급여 항목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북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재용 교수는 "직장 가입자들이 지역 가입자들에 비해 더 많은 부담을 물고 있어 형평성 확보가 시급한 과제"라며 "현행처럼 지역가입자에만 일괄 국고보조를 해주기보다 지역.직장 구분없이 저소득 계층, 차상위계층에 우선 국고보조를 해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최병고 기자 cbg@imaeil.com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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