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 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이맘때면 삶의 허망함이 손에 만져질 듯하다.

세월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흰눈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애! 그래도 우리는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묵은 편지의 답장을 써야 하고 이자까지 듬뿍 붙여 신세진 빚을 갚아야 한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 듯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리는 일 또한 새해맞이의 필수 과업이리라. 참된 송구영신이 어찌 말로만 되겠는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몇 십리 더가야한다고 다짐하던 한 시인의 눈 오는 저녁도 아마 섣달 그믐일 듯하다.

이 글의 독자들인 당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